영광내산서원보존회(회장 강재원)와 수은 강항선생기념사업회(회장 박석무)에서는 11일 내산서원에서 3차 문화재지킴이 기본교육(이하 지킴이 교육) 행사를 가졌다.
10시부터 시작된 지킴이 교육은 36명이 참석해 수은강항선생이 정유재란 당시 포로로 끌려가 일본에 유교를 전파한 과정에 대한 설명을 생생하게 수은 강항선생기념사업회 강대의 간사로부터 1시간 가량 전해 듣고 모두 감동을 받는 시간이 되었다.
특히 지킴이 교육에 참석한 김영철 불갑면장은 인사말을 통해 ‘수년전에 불갑면에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이미 강항선생의 위대한 역사와 문화에 대해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고 운을 떼며 ‘여기에 참석한 모든 분들께서도 이미 훌륭한 사회경험을 갖고 계신 걸로 안다’며 ‘애국 애족한 강항선생의 얼을 이어 받아 일상생활에서 많은 관심과 도움을 바란다’고 강조해 말했다.
마침 상사화축제를 앞두고 볼거리와 먹거리가 많은 불갑사근처 마실식당을 찾아 교육생들은 손두부와 청국장에 오찬을 갖고 굴비의 고장을 뛰어넘는 색다른 영광의 맛에 빠져들기도 했다.
1시 반 무렵 문체부와 전남도청에서 기념관 실사팀이 나왔고 대한민국 여성 대법관 1호인 김영란 전, 대법관과 강지원변호사(매니페스토실천가)부부가 ‘내산서원에서 여러 행사를 갖는다’는 소식을 듣고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참석해 주위의 시선을 끌었다.
또, 영광공업고등학교 학생 30여명을 지킴이 교육에 인솔한 강대열부장선생은 즉석에서 학생들에게 강지원, 김영란부부와 단체촬영을 유도하기도 했다.
함께 사진 촬영한 학생들의 실질적인 사회적 멘토이며 선망의 대상인 이들 부부와 단체촬영을 한 학생 개개인들은 보람과 자긍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이어 유물관을 둘러보고 강항선생의 종손이 가져온 각종 귀한 자료와 원본 분재기와 강감회요 등을 바라보며 세월의 흐름에서 많이 훼손된 書冊(서책)에 대한 안타까움을 일부 참석자들이 표출하기도 했다.
이들 실사팀들은 이어서 강항선생의 묘소를 둘러보면서 400여년의 흐름을 간직한 묘비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했으며 현대화되어 있는 상석과 비석에 대해 많은 조언을 했고 거듭 문화재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서원 관계자들에게 각인시키기도 했다.
한편, 지킴이 교육은 60여명이 퓨전국악한마당을 시작으로 해 선비들이 즐겨 부르던 일상생활속의 풀피리, 퓨전 난타, 가야금 연주 등을 들으며 옛 선비들에 대한 높은 학식과 일상의 흐름에 회상하며 잠시 골똘하기도 했다.
이어서 유형문화재와 무형문화재에 대한 강의로 김희태 전남도상임문화재전문위원이 일상 생활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문화재 설명을 곁들이면서 문화재에 대한 설명을 아주 쉬우면서도 이해가 빠르게 펼쳐 나갔다.
강재원 영광내산서원보존회장은 공사다망함에도 불구하고 찾아주신 분들을 환영하며 강항선생의 선비정신으로 우리 모두가 한마음 한 뜻으로 우리 자신을 修己治人(수기치인)의 정신으로 살펴보고 경계해 나아가는 생활이 되었으면 한다고 폐회말씀으로 전했다.
<편집자 주>
많은 독자들을 위해 수은강항 연보를 부록으로 올린다.
睡隱 姜沆先生 年譜
(수은 강항선생 연보)
-명종22년 1567년 정묘(1세) : 5월 17일, 영광 불갑 유봉리에서 몽오 (夢梧) 강극검공(姜克儉公)과 모친 영동 김씨(화순)의 5남 1녀 중 중 넷째로 태어나다.
-선조 4년 1570년 경오(4세) : 백형 해(瀣)<저어당 : 이이 율곡선생 문인>에게 수학하다.
-선조 5년 1571년 신미(5세) : 전라감사 신응시가 각(脚)자로 작문 운을 주자 <각도만리심교각(脚到萬里心敎脚)>이라고 응하자 탄복 하였다.
-선조 7년 1573년 계유(7세) : 맹자 1질을 하룻밤에 한 번 보고 모두 기억함에 책장수가 천재라 탄복하고 책을 그냥 주자 사양하니 정자 의 나무에 걸어 놓고 떠나 맹자정이라 함. 현재 불갑면소재지에 맹자정기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 근처를 맹자마을이라 칭함.
-선조 8년 1574년 갑술(8세) : 중국고서 통감감목을 하룻밤 새에 통달하여 고창군 아산면 칠암(칠암마을)고을에 강목촌(강목마을)이 생겨나고 현재 전해내려오고 있음.
-선조 9년 1575년 을해(9세) : 유성약천성부(幼成若天性賦)를 지었 다.(어릴 때 습성을 익혀두면 천성과 같이 된다는 내용)
-선조 10년 1576년(10세) : 우계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예와 경학을 터득함.
-선조 14년 1580년 경진(14세) : 모친 김씨 상을 당하여 禮(예)를 갖춰 정성을 다하다.
-선조 15년 1581년 임오(15세) : 母親喪(모친상)을 마치고 책문(策文)으로 향시(鄕試)에 합격하다.
-선조 15년 1583년(17세) : 향시에 합격(초시)
-선조 21년 1587년 정해(21세) : 진사시 삼장(三場)에 모두 합격 하다.
-선조 22년 1588년 무자(22세) :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다.
⦁관례를 하고 참봉(參奉) 김봉(金琫)의 딸 전주김씨와 혼인하다.
-선조 25년 1591년 신묘(25세) : 백형 저어당이 신묘사화로 화를 당 하다.
-선조 26년 1592년 임진(26세)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띄워 군량과 군기를 모아 의병장 제봉 고경명에게 보내다. 영광 임진 수성활동에 장문서로 참여하고 의병활동하다.
-선조 27년 1593년 계사(27세) : 광해군이 진주의 분조(分朝)에서 시 행한 정시에서 병과(丙科)로 합격하다.<김신국, 김홍우, 이진선 등 9 명이 뽑히다.
⦁소금과 절인고기 등 어염을 유통하고 백미 100석을 모아 사촌동생 만은공 강낙으로 하여금 고경명, 김천일, 최경장 의병소에 보내주다.
-선조 28년 1594년 갑오(28세) : 성혼(成渾)의 문인이라는 이유 때문 에 동인(東人)의 탄핵을 받아 교서관(校書館)에 분관되다.
⦁우계선생의 문호가 쓸쓸하니 멀리 찾아가 뵈다.
⦁겨울, 기주관(記注官)으로 경연에 입시하다.
-선조 29년 1595년 을미(29세) : 문한(文翰)을 잘 처리하여 선조(선 조)의 칭찬을 받다.
⦁성균관 박사가 되다.
-선조 30년 1596년 병신(30세) : 성균관 전적이 되다.
⦁가을에 병조, 공조좌랑을 거쳐 겨울에 형조좌랑이 되다.
-선조 31년 1597년 정유(31세) : 이른 봄, 휴가를 얻어 귀근하다가 5월에 분호조 참판 이광정의 종사관에 임명됨..
⦁여름,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군량을 모집하다가 남원(南原) 함락되자 영광(靈光)으로 되돌아오다.
⦁영광(靈光)에서 김상준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다.
⦁염산 논잠포에서 9월 23일 왜적이 영광(靈光)으로 돌아오자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떠나다가 영광 서북해안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다.
⦁아들 용, 애생이와 조카 등 어린아이들 6명중 4명을 바다에 수장 당하고 1명의 조카아이를 왜놈 땅에서 병으로 잃다.
-선조 32년 1598년 무술(32세) : 5월, 배를 빌려 탈출하던 도중 판도현(板島縣)을 지나다가 성문(城門)에 조선 침략을 비난하는 글을 써 붙이다. 3일 만에 좌도(佐渡)의 부하에게 붙잡혀 대진성(大津城)으로 되돌아오다.
⦁왜승 호인(好人)에게서 일본의 방여(方輿), 직관(職官)을 묻고 좌도가 (佐渡家)에 소장되어 있던 <왜국지도(倭國地圖)>를 베끼어 기록해두 고, 아울러 적정(敵情)과 방략(方畧)을 적어 김석복(蔚山人, 金石福) 에게 조정에 소를 올려주도록 부탁하다.
⦁6월, 대판성(大阪城)으로 옮기다.
⦁7월, 대판(大阪)에서 도요토미히데요시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새 도읍지인 복견성(伏見城)으로 옮기다.
-선조 33년 1599년 기해(33세) : 적중봉서를 중국(명나라)의 차관 왕건공(王建功)과 신정남에게 초소(草疏)를 주어 본조(本朝)에 보내게 하다.
⦁피노 중 강항 휘초 16종을 필사하여 왜승 후지와라 세이카 순수좌(등원성와)와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아까마쓰 히로미치에게 조선 주자학을 전수하다. 4서 5경을 포함해 16종 21책을 필사해 발문하다
-선조 34년 1600년 경자(34세) : 봄, 좌도(佐渡)에게 귀국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다. 왜승 경안(慶安)이 극력 권하여 허락을 받아 대마도 를 거쳐 거제도 장문포(장목) 5월 6일 귀국하게 된다.
⦁선조의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로 가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과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를 올리니 말 한 필을 하사받고 고향으로 내려오다. 건거록을 완성하다.
⦁당시 등용을 조정에서 권했으나 스스로 罪人(죄인)이라 칭하고 9월 고향 영광(靈光)으로 돌아와 부모를 봉양하고 후학양성에만 힘쓰다.
-선조 35년 1601년 신축(35세) : 좌의정 이덕형이 영남(嶺南)에 개부(開府)하여 왜(倭)의 사정을 묻자 예부절왜서(禮部絶倭書)를 지어 올리다. 가을에 운제마을로 거처를 옮겨 후학양성을 위해 운제서당을 열고 강학을 시작하다.
-선조 36년 1602년 임인(36세) : 대구향교 교수(敎授)에 서용되었으 나 바로 사직하고 돌아오다.
-선조 37년 1603년 (37세) : 강감회요를 완성하다.17권 30책.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 강항(姜沆) 엮음. 주희(朱熹)가 지은 강목(綱目)을 보완하여 엮은 책. 현종(顯宗) 8년(1667)에 그 아들 시만(時萬)이 간행하였다.
-선조 39년 1605년 (39세) : 불갑사중수문을 지음, 문선찬주를 완성함.
-선조 40년 1606년 병인(40세) : 회답사 여우길(呂祐吉)이 일본에서 돌아와 왜인(倭人)들이 공의 충의와 절개가 중국의 소무나 문천상 같다고 칭송한다며 동차록에 기록하여 아뢰었으나 북인(北人)들이 꺼리어 등용하지 않다.<여우길의 보고서에 있음>
김천일장군 행장을 지음.
-선조 42년 1608년 무신(42세) : 순천교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않음. 선조가 승하하자 방상(方喪) 3년을 입고 동양 최대의 장편시 원가행(怨歌行)을 지어 조상하다.
-광해군 2년 1610년 경술(44세) : 팔송 윤황(尹煌)이 영광군수로 부임 한 뒤 아들 윤순거(尹舜擧) 형제를 보내 수학(受學)하게 하다.
⦁광주향교 중건 상량문을 짓다.
-광해군 4년 1612년 임자(46세) : 절강총병이 조선의 경전지방에 왜 인이 잡서(雜棲)한다 하여 지휘사 황분이 왔는데 이를 변무하다. 무안 화설당의 기문을 지음
-광해군 7년 1615년 경술(49세) : 부친 몽오공(夢梧公) 상을 당하여 형제들과 3년 시묘살이에 들어가다.
-광해군 10년 1618년 무오(52세) : 5월 6일, 병으로 졸하다.
⦁11월, 불갑산(佛甲山)에 장사지내다.
⦁일주일도 안 되어 이조이 부인 복띠로 자진하다.(영광군지 참조)
-인조 6년 1628년 무진 : 문인 동토 윤순거가 행장을 짓다.
⦁함평이씨 이조이 부인 계유년 정려를 명받다.
-인조 13년 1635년 을해 : 불갑 유봉에 사우를 짓다. 우암 송시열이 축문을 짓다.
-인조 14년 1636년 병자 : 유봉리 사우가 실화로 재가 되어 이에 판 서 임담, 사성 김지수, 참봉 김우급 등이 발의하여 용산에 사우를 신 축하여 용계사라 하고 우암이 편액을 쓰다.
-효종 7년 1656년 병신 : 시남 유개가 간양록 서문을 짓다.
-효종 9년 1658년 무술 : 통정대부 승정원 승지로 증직되다. 문인 윤 순거(尹舜擧)가 문집(文集) 간양록(看羊錄)을 목판으로 간행하다.(宋 時烈의 序)
-현종 8년 1667년 정미 : 강감회요(綱鑑會要) 17권이 강행되다.(尹舜 擧의 序)
-현종 9년 1668년 무신 : 경연 연석(筵席)에서 이단하(李端夏)의 요청 으로 당상관(堂上官)에 추증(追贈)하라고 명하다.
-숙종 8년 1682년 임술 : 동토 윤순거를 용계사에 추배함. 조정에서 수은선생 절의가 한나라 소무와 같다고 하여 “금소무(今蘇武)”로 정 시 시험문제를 삼아 인재를 뽑고 사손 익(翊)을 주관사정에 제수하 다.
-숙종 35년 1709년 기축 : 용계사 사액을 청하자 권보덕이 제소(製疏)하다.
-영조 48년 1772년 임진 : 영조임금이 수은집을 예람하시고 선생의 절의를 한나라 소무, 송나라 문천상에 비하여 칭찬하고 7대손 재윤 을 도사로 조용하다.
-정조 22년 1798년 무오 : 성담 송환기가 묘갈명을 짓다.
-고종 5년 1868년 무진 : 후손 강란수(姜蘭秀)가 문집을 활자로 중간 하다.(姜蘭秀, 姜日會의 跋)
-고종 19년 1882년 임오 : 6월 2일 자헌대부 이조판서 홍문관 예문 관 대제학을 증직하다. 대제학 김상헌이 시장을 찬하다. 강감회요의 장판이 조성되다. 동토선생의 외손 정시수, 정시대 형제가 영광과 영 암군수로 부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고종 37년 1900년 경자 : 광무4년 6월 10일 지중추원사 강항에 치 제하다.
-일제강점기 1917년 정사 : 11대손 강대학(姜大學)이 수은집 속집(續 集)을 간행하다.
-일제강점기 1940년대 : 문집과 간양록이 왜인 경찰서장의 손으로 소 각되고 간양록도 몰수되어 분서(焚書)의 화를 당하였다.
-단기 4285년 1952년 : 현암 이을호 선생이 간양록 국역본 초판을 간행하다.
-단기 4313년 1980년 : 간양록 국역 4판이 발행됨.(수은 강항선생기 념사업회)
-단기 4317년 1984년 : 간양록 국역 5판(養英閣출판사). 간양록(조선 유자의 일본역류기 일역판, 박종홍 역주, 동양문고 평범사)
-단기 4321년 1988년 : 수은집 국역본이 간행됨. 전라남도(지사 송언 종) 광주박물관(관장 이을호)
-단기 4334년 2001년 :문화관광부에서 3월 이 달의 인물로 선정되다.
-단기 4347년 2014년 4월 : 수은 강항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강대욱, 기념사업회장 박석무) 재 발족
-단기4348년 2015년 : 꿈다락토요학교 ‘수은강항역사학교’개설 운영(전남문화관광재단)
-단기4349년 2016년 : 광양 수월정 세미나로 수월정기문 바로잡음. 이후 발제자인 김덕진광주교육대학교수 순천대학교에 광양수월정 오류에 대한 학술지에 논문발표함.
-단기4350년 2017년 : 문화재청 서원활성화사업 추진, 자유학기제운영 및 퓨전국악공연과 국제학술세미나 개최 / 강항기념관 타당성조사 용역(용역비 2,000만원 영광군) / 9월 영광군 농정과 지원으로 에이메현 오즈시 28명 ‘홍유강항선생현창비’4박 5일 견문 다녀옴.
-단기4351년 2018년 : 문화재지킴이 기본교육 유치, 9월 11일 강항기념관 문체부와 전남도청 실사, 10월 국제학술세미나 준비중
☞기사典據(전거) : 행장(윤순거 찬)<行狀(尹舜擧) 撰> 및 연보(속집)<年譜(續集)>,
국역 수은집,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건거록(巾車錄, 뒤에 간양록) 작성★
『간양록』에서 ‘간양(看羊)’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을 돌본다’는 뜻이다. 또한 중국 한나라 무제 때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흉노왕의 회유를 거부하고 양을 치는 노역을 하다가 19년 만에 돌아온 소무(蘇武)의 충절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강항先生 자신이 붙인 본래 제목은 『건거록(巾車錄)』이었다. ‘건거(巾車)’는 죄인을 태우는 수레이니 적군에 사로잡혀 끌려가 생명을 부지한 자신을 죄인으로 자처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나 강항先生이 세상을 떠난 뒤인 1654년에 그의 제자들이 책을 펴내면서 스승을 소무에 견주어 제목을 『간양록』으로 바꿨다. 강항선생이 『간양록』에 수록한 시 중에도 자신을 소무의 처지에 빗대는 대목이 몇 곳 나오기도 한다.
『간양록』은 ‘내가 겪은 정유재란’(涉亂事述), ‘적국에서 올린 상소’(賊中封疏), ‘내가 듣고 본 적국 일본’(賊中聞見錄), ‘귀국하여 임금께 올린 글’(詣承政院啓辭), 제자 윤순거가 쓴 발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적국 일본의 다양한 사정과 현실을 기록하고 장차 국방을 비롯한 조선의 국가정책에 관한 견해도 펼치고 있다. 예컨대 ‘전하께서는 장수 하나를 내실 때에도 신중히 생각하셔서 문관이든 무관이든 국한하지 마시고, 품계와 격식으로 예를 삼지도 마시고, 고루한 신의와 사소한 덕행도 묻지 마시고, 이름난 가문을 택하지도 마소서’라고 인재 기용에 대한 절절한 안타까움과 소망을 토로한다. 통상을 중시하여 대외교역이 활발한 일본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전하기도 한다.
-귀국하여 ‘임금께 올린 글’ 중에서
‘왜인들의 성질이 신기한 것을 좋아하고 다른 나라와 통교하는 것을 좋아하여 멀리 떨어진 외국과 통상하는 것을 훌륭한 일로 여깁니다. 외국 상선이 와도 반드시 사신 행차라고 합니다. 교토에서는 남만사신이 왔다고 왁자하게 전하는 소리를 거의 날마다 들을 수 있으니, 나라 안이 떠들썩한 이야깃거리로 삼습니다. .....먼 데서 온 외국인을 왜졸이 해치기라도 하면 그들과의 통교가 끊어질까 염려하여 반드시 가해자의 삼족을 멸한다 합니다. 천축 같은 나라도 매우 멀지만 왜들의 내왕이 끊임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가장 위대한 한일 간 문화전도사
강항先生은 후지와라 세이카의 질문에 응하여 조선의 과거제도와 춘추 석전(釋奠)의례를 설명해 주었다. 후지와라는 강항先生과 조선인 선비 포로들에게 은전을 주면서 경서(經書)를 써 달라 부탁했고, 조선의 의례복을 만들어 상례, 제례의식도 익혔으며 공자묘도 세웠다.
강항先生과 조선 선비들이 쓴 경서는 주자(朱子)의 주석에 따라 훈점(訓点)을 표시한 『사서오경왜훈(四書五經倭訓)』 편찬 작업의 일부였다. 다지마 성주 아카마쓰가 재정을 후원하고 후지와라 세이카가 편찬을 총괄하면서 강항先生이 큰 역할을 한 이 책이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성리학 텍스트였다.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林羅山)은 스승의 추천으로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강(侍講)이 된 이후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르기까지 막부의 시강으로 일했다. 하야시의 사숙(私塾)은 에도유학의 거점 구실을 했다.
‘우리나라(일본)의 유학박사는 옛날부터 한나라, 당나라의 주소(註疏)를 읽고 경전에 점을 찍고 일본어식 훈(訓)을 달았을 뿐이다. 그러면서 정주(程朱)의 서적에 이르면 아직 십분의 일도 모르며 성리학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이에 선생(후지와라 세이카)이 아카마쓰 씨에게 권유하고, 강항先生 등에게 사서오경을 정서하게 했다. 선생은 스스로 정주(程朱)의 뜻을 따랐는데, 이것이 훈점본이 되었으니 그 공이 매우 크다.’
■일본 유학자의 문집(하야시 라잔전집) 글 인용
‘안타까워라 중국에서 태어나지 못했음이여! 또 왜 조선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일본에서, 그것도 바로 이런 때 태어났을까요? 내가 신묘년(1591) 3월에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려했더니 병에 걸려 돌아와야 했고, 병이 좀 나으면 조선으로 가려했더니 연이어 전쟁이 벌어져 나 같은 사람을 받아줄까 싶어 감히 바다를 건너가지 못했습니다. 귀국(조선)을 구경하지 못하는 것도 아마 운명인가 봅니다.’-
『간양록』에 기록된 후지와라 세이카가 강항先生에게 한 말이다.
이로 유추하면 후지와라는 왜승이지만 유학에 관심 깊은 선각자라고 할 수 있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1590년 경 교토 다이도쿠지(大德寺)에서 조선통신사와 교류하면서 정주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강항先生과의 교유를 통해 비로소 성리학자이자 유학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했던 것이다. 강항先生은 일본에 억류당해 있던 시절 『곡례전경(曲禮全經)』, 『소학』, 『근사록』, 『근사속록』, 『근사별록』,『통서』, 『정몽』등 16종의 경서 및 성리학 텍스트를 실은 『강항휘초(姜沆彙抄)』를 남겼으며 이는 오늘날 일본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학문과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며 은거하다 강항先生이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다지마 성주 아카마쓰 히로미치와 후지와라 세이카 덕분이었다. 후지와라는 강항先生과 교유하면서 은전을 주어 생활비와 장차 돌아갈 때 쓸 비용을 마련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가 유학자가 되면서 스스로 지은 ‘세이카(惺窩)’라는 이름이자 호도 강항先生이 그를 위해 써준 ‘성재기(惺齋記)’와 ‘시상와기(是尙窩記)’에서한 글자씩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카마쓰는 강항先生에게 증명서를 얻어주어 관문들을 무사히 지날 수 있게 해주었고, 후지와라는 사공 한 사람을 더 붙여주어 대마도까지 항로를 인도하게 했다. 일본 승려 게이안(慶安)도 오즈 성주 좌도(佐渡)에게 강항을 풀어줄 것을 적극 권했다.
오늘날 일본 에이미현 오즈시 중심가 시민회관 앞에는 1990년에 건립된 ‘홍유강항현창비(鴻儒姜沆顯彰碑)’가 서 있다.
강감회요[綱鑑會要]란?!
요약 조선 중기의 학자 강항(姜沆:1567~1618)이 지은 중국의 역사서.
목판본. 17권 30책. 1667년(현종 8) 간행. 강항은 주희(朱熹:朱子)가 지은 강목(綱目)에 간혹 미진한 점이 있어,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소미강씨(少徵江氏)의 《통감절요(通鑑節要)》(=자치통감[資治通鑑])와 유우익(劉友益)의 《강목서법(綱目書法)》과 윤기신(尹起莘)의 《강목발명(綱目發明)》을 종합하고, 그 중에서 요점만을 가려내어 엮은 것이다. 한 권의 양이 많아 제1 ·제4 ·제20권을 제외한 나머지는 2책으로 나누었다. 내용은 강목과 같이 주(周) ·한(漢) ·진(晉) ·남북조(南北朝) ·수(隋) ·당(唐) ·오대사(五代史)로 되어 있다. 저자의 제자인 윤순거(尹舜擧)가 1667년(丁未)에 쓴 서문이 있고, 강항의 아들 시만(時萬)이 이것을 간행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요약 중국 북송(北宋)의 사마 광(司馬光:1019~1086)이 1065년~1084년에 편찬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294권. 《통감(通鑑)》이라고도 한다.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이 진(晉)나라 3경(卿:韓 ·魏 ·趙氏)을 제후로 인정한 BC 403년부터 5대(五代)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때인 960년에 이르기까지 1362년간의 역사를 1년씩 묶어서 편찬한 것이다. 주기(周紀) 5권, 진기(秦紀) 3권, 한기(漢紀) 60권, 위기(魏紀) 10권, 진기(晉紀) 40권, 송기(宋紀) 16권, 제기(齊紀) 10권, 양기(梁紀) 22권, 진기(陳紀) 10권, 수기(隋紀) 8권, 당기(唐紀) 81권, 후량기(後梁紀) 6권, 후당기(後唐紀) 8권, 후진기(後晉紀) 6권, 후한기(後漢紀) 4권, 후주기(後周紀) 5권 등 모두 16기(紀) 24권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사마 광이 《통지(通志)》 8권을 찬진(撰進)하자 영종(英宗)이 편찬국(編纂局)을 개설하고 사마 광의 주재하에 유반(劉攽)이 전 ·후한(前後漢)을, 유서(劉恕)가 삼국(三國)으로부터 남북조(南北朝)까지를, 범조우(范祖禹)가 당(唐)나라 및 5대를 각각 분담하여 기술하였다. 정사(正史)는 물론 실록(實錄) ·야사(野史) ·소설(小說) ·묘지류(墓誌類) 등 322종의 각종 자료를 참고로 하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서법(書法)에 따라 완성하여 신종(神宗)이 《자치통감》이라 이름을 붙이고 자서(自序)를 지었다.
자치통감이라 함은 치도(治道)에 자료가 되고 역대를 통하여 거울이 된다는 뜻으로, 곧 역대 사실(史實)을 밝혀 정치의 규범으로 삼으며, 또한 왕조 흥망의 원인과 대의명분을 밝히려 한 데 그 뜻이 있었다. 따라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지 않고 독특한 사관(史觀)에 의하여 기사를 선택하고, 정치나 인물의 득실(得失)을 평론하여 감계(鑑戒)가 될 만한 사적을 많이 습록(拾錄)하였다. 편년에 있어서도 3국의 경우에는 위(魏)나라의 연호를, 남북조의 경우에는 남조의 연호를 각각 써서 그것이 정통(正統)임을 명시하였다.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기사에는 ‘신광왈(臣光曰)’이라고 하여 사마 광 자신의 평론을 가하고 있어 그의 사관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의 사실의 진부에 대해서는 사마 광이 따로 《통감고이(通鑑考異)》 30권을 지어 사실의 고증에 참고가 되게 하였으며, 《통감목록(通鑑目錄)》 30권과 《통감석례(通鑑釋例)》 1권에서는 각각 목록 및 범례를 나타내고 있다. 또 사마 광은 《계고록(稽古錄)》 20권을 지어 이 책 내용의 부족을 보충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