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교육대학교 김덕진교수
1. 머리말
강항(姜沆)은 본관은 진주, 자가 태초(太初), 호가 수은(睡隱)으로 영광에서 1567년(명종 22)에 태어났다. 1593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 공조좌랑,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지인들이 수은에게 준 시 속에 ‘원외(員外)’가 나오는데 이는 ‘랑(郞)’을 역임하여서 그런 것이다(원외는 원외랑의 준말).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에 피랍되어 일본에서 억류 생활하다 1600년에 돌아왔다. 이후부터 1618년(광해군 10) 생을 마칠 때까지 영광에서 19년간 살며 독서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이에 반해 정홍연(鄭弘衍)은 본관은 동래, 자는 덕일(德逸), 호가 죽창(竹窓)으로 서울에서 수은보다 2년 앞서 1565년(명종 20)에 태어났다. 그는 1593년에 “余避亂于海隅 僑居一巷”이라 하여 왜란을 피해 영광으로 내려왔다. 둘째 아들이 1580년 생인 점으로 보아 가족과 함께 왔다가 영광군 백수읍 지산리에 정착하였다. 광해군 때에 선공감 감역, 제용감 판관, 거창현감, 양천현령, 동복현감, 익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624년부터는 관직을 그만두고 영광에서 살다 1639년(인조 17)에 생을 마쳤다. 함평 출신의 유학(幼學) 정색(鄭穡)이 죽창 만사에서 “금서(琴書)를 스스로 즐김은 타고난 소질이고, 시주(詩酒)를 무단히 바쁘게 하였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죽창은 영광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은(睡隱)과 죽창(竹窓)은 수은이 일본에서 돌아온 1600년부터 수은이 생을 마감한 1618년까지 영광에서 교유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의 교유에 관한 연구는 당시 영광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잘 알려지지 않은 수은의 영광에서의 활동과 아직 학계에 소개되지 않은 죽창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점을 알게 해줄 것이다.
특히 수은은 일본에 주자학을 전파한 인물로 알려져서 그에 대한 연구는 꽤 많은 편이지만, 지역활동에 대해서는 연구가 일천한 수준이다. 그리하여 그의 많은 제자들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켰던 점 등 많은 사실들이 밝혀져 있지 않다. 그리고 죽창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거의 없고, 영광읍지 본조음사 조항에 “호가 죽창으로 동래인이며 대제학 사(賜)의 후손이다. 군수를 지냈으며 지산(芝山)에 사당이 세워졌다.”고(사당이란 芝山祠를 말한다), 그리고 아주 짧은 죽창집 해제만이 참고 될 따름이다.
수은과 죽창은 깊게 교유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정치적으로 두 사람 다 서인(西人)으로 당색이 같았다. 수은의 제자로 서인의 대표 인물 윤순거(尹舜擧, 1596~1668)가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죽창은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기뻐서 지은 시가 있다. 수은과 죽창이 교유하였던 변충원, 임서, 임전, 김우급 등도 반광해군 인물이어서 한 때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지기로서 교유하였다. 이 점에 대해 수은의 큰 아들 강시만(姜時萬, 1603~1673)이 죽창의 죽음을 애도한 만사에서 “昔我先君友 追隨金石堅 習池同醉月 金谷共華筵”이라고 하였다. 즉, 죽창은 나의 아버지 친구로서 서로 상종하시기를 금석과 같이 하셨고 달빛 아래에서 흥겨운 주연을 함께 즐기셨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두 분이 매우 가까웠음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두 사람의 깊은 교유는 우선 서로의 제자⋅지인을 상호 격려하고 지도하였다. 그리고 집안 간의 결혼으로도 이어졌는데 죽창의 손녀 사위, 즉 죽창 둘째 아들 광신(廣紳)의 사위로 강시경(姜時儆)이 들어왔다. 두 분이 교유한 흔적은 두 인물의 문집 속 창화 시 속에 담겨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분석해 보겠다.
그러나 그 정도만 가지고는 교유의 폭과 내역을 밝혀내는 데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필자는 두 분의 문인록(門人錄)이나 만사록(挽詞錄)을 교차 검토하는 작업도 진행해 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은⋅죽창 지인들의 정치적 성향이나 대외활동에 대해서도 알아보겠다. 아직까지 기초적인 인적 사항마저 정리되어 있지 않아, 이 글은 후일의 수정⋅보완이 필요함을 미리 밝혀둔다.
2. 문인록 속의 교유
1) 수은 은시록(誾侍錄)과 죽창
수은은 일본에서 돌아온 후 관직 제수에도 불구하고 나가지 않고 영광에서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 점과 관련하여 6대손 강태환(姜台煥)이 ‘崇禎紀元後三甲申’ 입춘일에 작성한 은시록(誾侍錄)을 살펴보자. 은시록은 수은 문인록으로 현재 수은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다.
강태환은 은시록 발문에서 일찍이 진산세고(晋山世攷)를 쓰면서 유집(遺集, 수은집) 중에서 초록하여 적고 문예가(門裔家)에 물어서 기록하여 삼가 안(案)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은시록은 수은이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강태환이 진산세고를 쓰면서 수은 문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을 뽑아서 해당 집안에 확인한 후 만든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더러 착오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이 진산세고가 무엇이고 현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못 하였다. 1476년(성종 7) 강희맹(姜希盟)이 편집⋅간행한 강회백(姜淮伯), 강석덕(姜碩德), 강희안(姜希顔) 등의 3대에 걸친 문집 진산세고(晉山世稿)와는 다른 것으로 추정된다.
은시록에는 모두 69인의 수은 문인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죽창집 속의 시에 상당히 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강시언(姜時彦), 박안제(朴安悌), 변충원(卞忠元), 신응망(辛應望), 유흥세(柳興世), 정제원(丁濟遠) 등이 확인된다. 그리고 수은의 은시록 속 69인 가운데는 죽창 만사록에 강시억, 강시언, 김우급, 김진, 박안제, 박안효, 신응망, 유흥세, 이율, 임련 등 10인이 보인다. 이 중에서 신응망과 정건⋅제원 부자에 대해서만 수은⋅죽창과 어떤 관계였는지를 자세히 살펴보겠다.
먼저, 신응망에 대해 알아보겠다. 신응망(辛應望, 1595~1654)은 본관은 영산, 자는 희상(希尙), 호는 한사(寒沙)로 영광에서 태어났다. 그는 “임진왜란 뒤로 가산이 탕진되었으므로 어머니가 식량을 꾸어주어 수은 강항의 문하에 가서 수업하였는데, 학문이 날로 진취되었다.”고 할 정도로 수은의 독실한 제자였다.
수은 문하에서의 수학을 토대로 1617년 사마시, 1624년 증광시 급제 후 승문원 주서를 거쳐 흥양현감(興陽縣監, 1628~1629), 공조정랑(工曹正郞), 예조정랑(禮曹正郞), 경상도사(慶尙都事, 1631), 함평현감(咸平縣監, 1634~1635), 황해도사(黃海都事, 1642), 공홍도사(公淸都事, 1645),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1646~1647), 파주목사(坡州牧使), 1649), 장흥현감(長興縣監, 1652~1654) 등을 역임하였다. 신응망의 형이 신응순(辛應純, 1572~1636)이다.
신응순은 자는 희순(希淳), 호는 성재(省齋)이고, 1603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성재집과 성재만록을 남겼다. 그의 아들 신사효(辛思孝)가 은시록에 수록되어 있으니 수은 문인이었음에 분명하다.
죽창은 신응망에게 많은 시를 지어주고 서로 창화하였다. 「送寒沙佐幕嶺南」, 「次希尙在洛韻述懷」, 「別贈辛正郎赴闕」, 「送辛希尙佐幕嶺南時赴闕之行仍述自懷」, 「送辛都事之京」, 「寄辛都事獨賞雙溪竹」, 「與寒沙及諸公唱和」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送寒沙佐幕嶺南」, 「送辛希尙佐幕嶺南時赴闕之行仍述自懷」는 신응망이 1631년(인조 9)에 영남도사로 나가는 것을 축하해준 시이다.
이는 비록 수은 사후에 일어난 일이지만, 죽창이 수은의 제자들과 널리 교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죽창과 신응순 사이에 오고간 시도 적지 않게 있다. 동생 신응망이 죽창 집에 가서 여러 날 어울리며 지은 시의 첩(帖) 형에게 보여주자, 형인 신응순이 차운한 시가 성재집에 여러 편 실려 있다.
이어, 정건⋅제원 부자에 대해 알아보겠다.
정희맹(丁希孟, 1536~1596)은 본관은 영성(영광), 자는 호연(浩然), 호는 고산(孤山)⋅선양정(善養亭)이다. 성수침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영광 수호를 위해 의병을 일으켰고, 문집으로 선양정집을 남겼다. 그의 둘째 아들이 정건(丁鍵, 1565~1618)이다. 정건은 본명은 정협(丁鋏)으로, 자는 자장(子長)‚ 호는 성경재(誠敬齋)이고, 문집으로 성경재집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하였고, 광해군 계축년에는 분산(粉山) 아래에 축실(築室)하고서 두문불출하였다고 한다. 정건은 수은보다 2년 선배인데 은시록에 수은 제자로 기록되어 있다. 정건이 초청하는 편지를 보내자, 수은이 가을까지 기다리지 않고 찾아가겠다는 답장을 보낸 적이 있어서(「자장 정협에게 답하다」), 은시록에 수록된 것 같다.
윤운구(尹雲衢)가 영광 연흥사에서 수은과 정건이 함께 어울린 적도 있다(「연흥사에서 장보의 시를 차운하다가 정자장이 먼저 돌아감으로 끝귀절에 희롱하다」). 정건의 아들이 정제원(丁濟遠)인데 자가 백인(伯仁)으로, 역시 은시록에 수은 문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수은집에는 그와 관련된 글은 발견되지 않는다.
은시록 첫 페이지
은시록 발문
죽창은 정건에 대해 ‘經世之才’라고 평하였다(「묘갈명」). 그리고 정제원이 대곡(大谷)에 새 집을 짓자 가서 하룻밤을 자면서 축하해 주었다(「丁伯仁大谷新軒夜吟」). 그리고 정제원의 어머니 강씨(姜克讓의 딸)가 죽자 만사를 지어 애도하였는데, 평생 펼친 부도(婦道)가 자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고 말하였다(「挽丁伯仁母夫人」). 또한 정제원이 늦게 아들을 낳자 축하해주었는데, 그대 집에 경사가 겹쳐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였다(「賀丁伯仁晩得奇男子」).
죽창집을 보면, 선양정(善養亭)을 읊은 시가 꽤 많다. 선양정이란 정희맹이 용산(龍山) 북쪽에 있는 용수(龍水) 위 산록에 수칸으로 지은 누정 별서이다. 그래서 그런지 정씨들과 관련된 시 또한 다수 눈에 띈다. 성경재집에 죽창에게 보낸 편지가 4편 수록되어 있다. 죽창은 정희맹의 아들 정건의 만사를 지었다.
2) 죽창 만사와 수은
죽창집 부록에는 70 평생을 살다간 죽창에 대한 36인의 만사(挽詞)가 수록되어 있다. 만사란 가까운 사람이 읊은 것이란 점을 감안하면, 만사록 수록자는 죽창의 절친이나 제자였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가운데 은시록에 이름이 수록되어 있는 인물이 여럿 있다. 강시억(姜時億), 강시언(姜時彦), 김우급(金友伋), 김전(金瑱), 박안제(朴安悌), 박안효(朴安孝), 신응망(辛應望), 유흥세(柳興世), 이율(李慄), 임련(林堜) 등이 그들이다.
이 가운데 박안효⋅안제 형제는 본래 서울 사람이다. 박씨 형제가 수은의 제자가 된 계기는 그의 아버지 박정현(朴鼎賢)이 영광군수를 역임한 것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박정현은 1603년부터 1608년까지 6년간 영광군수를 역임하였다. 박안효가 1639년 죽창 만사에서 오성(筽城, 영광 별호) 고을에서 상종한 지 40여 년 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수은이 일본에서 돌아온 1600년 이후에 수은 문하에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
동생 박안제는 동헌(東軒)에서 다시 만나 남루(南樓)에서 헤어진 지 10여년이 지났다고 하였다. 박씨 형제가 수은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박정현의 이임으로 영광을 떠나자, 수은은 「박백심⋅계심 형제를 보내며(안효⋅안제)」라는 시에서 “총각 시절 서로 만났던 곳에서, 이제 보니 두 장부가 되었구나”라고 말하였다.
한편, 죽창이 박씨 형제와 만난 때는 수은이 세상을 떠나고, 박안제가 영광군수로 온 1628(인조 6)~1630년(인조 8)이다. 이 시기에 죽창이 박씨 형제에게 주거나 창화한 시가 상당히 많다. 「次朴使君季順韻仍呈雲錦亭中」, 「與朴使君連衾奉別」, 「朴使君季順九峀少時會」, 「次朴使君季順會風香亭韻」 등이 있다.
죽창이 박안제 군수와 운금정(수은 기문), 구수사(군 서 20리 구수산), 풍향정 등지에서 함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與朴使君連衾奉別」을 보면, 3년 우로(雨露) 아래에서 인정(仁政)을 베풀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함께 자며 이임식까지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대부분은 영광이나 그 인근 출신이다. 그 가운데 이율은 만사에서 죽창으로부터 평생 과분한 권장을 받았다고 하였으니, 죽창 문하에서 수학을 하거나 교화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우급(金友伋, 1574∼1643)은 만사에서 죽창에 대해 죽창이 동복현감(1621~1622)으로 부임하던 날 본인은 궁려(窮廬, 폐모론 반대로 유적 삭거)에 있었지만, 10년 만에 편지(만사) 한 장 보낸다고 한 것으로 보아, 친하지만 중간에 다소 소원하였던 것 같다.
여기서 한 가지 특징적인 점은 죽창에 만사를 보낸 사람 가운데는 수은 제자 외에, 강시억(姜時億, 수은 형 姜濬의 큰 아들), 강시만(姜時萬, 수은의 큰 아들), 정명달(丁名達, 수은 동생 姜泳의 사위) 등 수은 집안사람들이 상당수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강시억은 만사에서 ‘自我連家歲二周, 忘形幾度樂同遊’라 하여 이웃으로 산지가 2년이나 되었고 그 기간 동안 함께 노닌지가 여러 번이라고 하였다.
죽창집 서문
죽창 만사
이 외에 수은 친인척 가운데 죽창과 가까이 보낸 이가 있다. 수은집을 보면, 수은의 종숙인 사추(士推) 강극서(姜克恕)가 나온다. 종숙과 만나서 서울 이야기 하였다고 하니, 그는 서울 출신인 것 같다. 데릴사위가 되어 살면서 쇠미함을 퍽이나 개탄하기에, 수은이 시로써 위로해 준 적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재력을 모았는지, 한강 양화도 경치 좋은 곳에 집도 지었다.
이런 강극서에 대해 죽창 또한 많은 시를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죽창이 양천현감일 때 꿈속에서나 보았던 강극서가 기약도 없이 배를 타고 방문하였다가 돌아갔다. 서울에서 남쪽 객들이 만나니 밝은 달빛이 양천 하늘 정자 위에서 비친다고 하였다. 동헌에서 같이 잠을 자며 객지 생활 이야기를 많이 하였던 것 같다. 이처럼 죽창에 만사를 보낸 사람 가운데 수은 문인들은 물론이고 친족들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의 교유도 활발하였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수은과 죽창 두 분 사이의 교유가 두터웠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3. 문집 속의 교유
1) 수은집과 죽창
수은집 속에는 죽창과 교유한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죽창이 직접 거명된 시 두 편을 살펴보자.
A - 鄭益山欲以醉仙弟妹試我戲寄
B - 舟中次鄭益山弘衍韻
小橋家在九峯西。聞說春魂未解迷。
居士不知雲作夢。禪心已似絮黏泥。
自慙山鳥驚檀板。忍許靑鸞伴木鷄。
茹藘縞衣聊樂我。半生曾擧案眉齊。
風輕海闊暮帆斜。已落殘陽又月華。
躑躅成山君莫算。滿船淸唱盡名花。
A는 「정익산(鄭益山)이 취선(醉仙)이란 제매(弟妹)로 나를 시험하고자 하여 희작(戲作)하여 보내다」이다. 정익산이란 익산군수를 역임한 정홍연이란 말이다. 정홍연이 익산군수를 역임한 때는 1622~1623년이다.
이때는 수은이 죽고 없는 시기이다. 따라서 본래는 정홍연의 자나 호가 적혀 있었을 텐데 후손이 문집을 편집할 때에 ‘익산’이란 말을 추가하였을 것 같다. 내용을 보면, 수은이 구봉(九峯, 구수산?) 쪽으로 놀러왔다. 구수산은 정홍연이 살고 있는 곳이다. 이때 죽창이 ‘여동생’(기생?)으로 하여금 수은의 수청을 들어주라고 했는데 그것을 수은이 반평생 동안 밥상 차려준 아내 생각에 거절한 내용이다.
B는 「배 안에서 정익산의 운을 차하다」이다. 수은은 영광군수의 부름을 받고 서포(西浦, 법성포)에 갔다. 때는 봄철 단오쯤 되었던 것 같다.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선유(船遊) 놀이도 예약되어 있었다. 그때 수은은 죽창과 한 배에 탔다. 죽창이 선창을 하자, 수은이 그에 차운한 것이다. A와 B는 동일 시기에 일어난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수은이 구수산이나 법성포 등 영광 서쪽 지역을 자주 방문하였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죽창과의 교유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죽창은 거명되어 있지 않지만, 죽창과 함께 하였을 것으로 판단되는 시도 수은집 속에 다수 수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長沙의 읍재 子愼 林복(㥠로 개명)이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감을 보내다」라는 시를 검토해 보자. 장사(長沙)란 무장의 별호이고, 자신(子愼)은 임서(林㥠, 1570~1624)의 자호이다. 임서는 무장현감으로 1604년(선조 37) 부임해 와서 1609년(광해군 1)까지 6년간 근무하였다.
그 사이 수은은 임서와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자주 만났던 것 같다(「사군 임자신이 이름난 미녀를 별원에다 두고 소오로 이름하였다」). 따라서 위 시는 임서가 무장을 떠나는 1609년에 수은이 지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수은은 임서의 두 아들 임련(林堜, 1589~1648, 자 東野, 호 閒好⋅夢坡), 임담(林墰, 1596~1652, 자 載叔, 호 淸臞)을 문인으로 두었다. 임련은 1604년에 아버지의 명에 의해 강항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수은 사후일텐데, 임련은 강수백(姜壽伯, 누구의 자일 것 같음)을 대하고서 스승이 살았던 운제(雲堤)를 떠올렸다. 임담의 경우 9세이던 1604년에 아버지를 따라 무장현에 가서 그곳 거사(居士) 한흡(韓洽)에게서 수학하였다. 그리고 14세이던 1609년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교관(敎官) 김경선(金慶先)에게 취학(就學)하였다.
임서가 무장현감으로 있으면서 수은을 만날 때 죽창도 함께 하였다. 죽창은 이 인연을 계기로 임서에게 「임자신이 진현(陳玄)을 보냄을 사례하다」라는 시를 지었고, 그의 아들 임련이 죽창 만사를 보냈다. 이때 수은이 「松沙 別館에서 鳴皐의 운을 차하여 거문고 퉁긴 자에게 주다」라고 하였듯이, 임전(任錪, 1560~1611. 본관 풍천, 문집 명고집)과도 교유하였다. 마찬가지로 이때 죽창 또한 임전과 교유하였다.
2) 죽창집과 수은
죽창집 속에는 수은에게 주거나 수은과 함께 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한 일화를 살펴보자. 승려 현상인(賢上人, 수은집에는 義玄으로 나온다)이 봄에 수은을 찾아와서 시축(詩軸) 서문을 요청하였다. 가을에 사미승을 보내서 재촉하며 두류산⋅금강산으로 떠난다고 하였다. 하는 수 없이 수은은 서문을 지어주었다. 이와 관련된 시문이 수은집 속의 「贈玄上人用玄洲韻」, 「題義林詩軸」, 「僧義玄求詩」, 「送義玄入頭流序」이다.
죽창도 수은의 ‘軸詩序’ 끝에 수은 시를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太初 姜友의 운을 차하여 賢上人 軸詩序 끝에 쓰다」라는 시에서 종소리에 암자에서 새벽잠을 깨고 보니, 스님은 향불 피워 예불을 올린다고 하였다. 그리고 죽창도 ‘軸詩序’를 썼다. 사연은 이렇다. 죽창이 영남에 있었다. 영남에 있었다는 말은 거창현감(居昌縣監)을 말한 것 같다.
거창읍지에 ‘丙辰來 丁巳去’라고 적혀 있으니, 죽창은 1616~1617년 재임하였다. 그때 현상인이 방장산을 유람하면서 찾아왔다. 죽창이 보니 총명하고 단아한데다 유학경전과 역사서까지 조금 알고 있어 가히 대화할만 하였다. 그러고 죽창은 영광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현상인이 옛 정을 잊지 않고 죽창이 살고 있는 적막한 바닷가를 찾아왔다. 죽창은 그와 한담을 나누었다.
그 끝에 소매에서 수은의 편지를 내 보이니, 죽창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현상인이 스스로 율시 한편을 읊어 주면서, 죽창으로 하여금 그에 대해 창화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죽창은 인정과 의리상 안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니 사양하겠다고 말하였다. 더군다나 대선비 수은 필적 옆에 자신의 글을 댄다는 것은 더더욱 그럴 수 없다고 하였다.
당시 수은은 문장과 인물이 높아 그의 글을 받아가려는 사람이 많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아 사양하였지만 수은의 편지까지 내보이며 간곡히 요청함을 저버릴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글을 적는다고 하였다. 죽창집에는 이 현상인에게 지어준 시가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4. 수은과 죽창의 지인들
수은과 죽창의 지인을 보면, 몇 가지 공통분모가 발견된다. 하나는 수은⋅죽창의 지인 가운데 영광군수가 들어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한 제자를 두 사람이 지도하였다는 점이고, 그리고 두 사람의 지인들이 호란 의병을 일으켰다는 점 등이다. 하나씩 살펴보겠다.
첫째, 영광군수는 물론이고 인근의 무장현감, 무안현감, 광주목사 등과 어울린 글이 두 문집에 많이 수록되어 있다.
수은집을 보면, 무안군수 정념(鄭恬)⋅鄭운, 무장현감 성계선(成啓善, 1602~1603 재임)⋅임서(林㥠, 1604~1609 재임) 등이 보인다. 그리고 영광군수로는 경섬(慶暹, 1600~1601 재임), 이춘기(李春褀, 1602~1603 재임), 박정현(朴鼎賢, 1603~1608 재임), 윤황(尹煌, 1609~1613 재임), 유석증(俞昔曾, 1613~1615 재임) 등이 확인되고 있다.
이 가운데 수은은 1609년부터 1613년까지 5년간 영광군수로 재임한 윤황과 가깝게 지냈던 것 같다. 시기적으로는 일본에서 돌아온 후 마음이 안정된 때여서 그랬을 것 같고, 수은과 윤황 같이 우계 성혼의 제자이고, 윤황은 우계의 사위이기도 하다.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윤황에 대해 「尹侯를 보내면서」라는 시에서 수은은 윤황을 ‘斯文의 正脈’이라고 하였다.
윤황은 윤훈거(尹勳擧, 尹勛擧), 윤순거(尹舜擧), 윤상거(尹商擧), 윤문거(尹文擧), 윤성거(尹成擧), 윤선거(尹宣擧) 등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첫째와 둘째 아들 윤훈거⋅순거가 수은의 제자이다. 수은은 영광을 떠나는 윤훈거⋅순거 형제에게 내외가 명가의 후예로서 똑같이 귀한 기풍 남아 있다고 하면서, 전날에 글을 읽던 곳에서는 물소리만 졸졸 들린다고 말하였다(「윤여시⋅여관 형제와 작별하다」).
죽창집을 보면, 무장현감 임서가 보인다. 그리고 영광군수로는 정양필(鄭良弼, 1624~1628 재임), 박안제(朴安悌, 1628~1630 재임), 임광(任絖, 1630~1631 재임), 박황(朴潢, 1631~1632 재임), 윤효영(尹孝永, 1634~1635 재임), 송몽석(宋夢錫, 1635~1637) 등이 확인되고 있다. 정양필 등 영광군수는 모두 수은 사후에 재임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 영광군수를 매개로 해서는 수은 사후여서 수은과 죽창이 교유할 수는 없었지만, 무장현감 임서를 통해서는 상호 교유가 있었다. 박정현⋅안제 부자의 경우도 박안제를 통해서는 시기적으로 수은과 죽창이 교유할 수는 없었지만, 박정현을 통해서는 상호 교유가 가능하였다. 특히 수은집이나 죽창집을 보면, 영광⋅무장 두 수령과 함께 어울린 적이 있었다.
둘째, 한 사람에 대한 격려와 지도 내용이 두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한 인물로 변충원(卞忠元, 1568~?)을 들 수 있다. 변충원은 수은보다 1년 뒤 1568년(명종 22)에 태어나서 1603년(선조 36)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는데, 그 좌목에 거주지가 경기도 부평으로 기록되어 있다. 1615년(광해군 7) 7월에 반광해군 역모 혐의로 문초를 받고 10월에 영광으로 유배되었다(응천일록). 이때 수은 문하에 와서 수학을 하였을 것 같다. 유배 생활은 1624년(인조 2) 갑자년까지 이어졌다.
갑자년에 의병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쌀을 바쳤다. 해배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624년 정도 추정할 수 있다. 해배 이후 김포현령을 역임하였다. 도임년은 알 수 없지만, 이임년은 1627년 또는 이 이전이다. 그런데 또 영광에 왔다가, 정묘년(1627) 10월에 영광 우사(寓舍)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따라서 변충원은 영광에서 유배 생활하고 있던 1615~1624년 또는 재차 내려온 1627년 무렵에 수은과 죽창을 따랐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은시록에 수은의 문인으로 나와 있는 인물인데, 죽창집을 보면 죽창의 문인으로도 보여진다.
수은집을 보면, 변충원과 관련하여 다섯 편의 시가 있다. 수은은 「卞江陰의 운을 차하다」에서 나도 3년 동안 이역만리에 있었다고 하면서 현재를 너무 탓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으로 보아, 변충원은 영광에서 유배 생활 중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벽지에 오는 이 없는 터에 일부터 찾아오니 고맙다고 말하였다. 「藎初가 찾아와 그 운을 차하다」에서도 앞 시와 비슷한 내용을 읊었다. 「변신초의 시를 차운하다」에서는 밤에 연회가 있었고, 「변신초의 운을 차하다」에서는 북객(北客)이 가려 한다고 보아, 수은 생전에 해배 시도도 있었던 것 같다.
죽창집에도 변충원과 관련된 시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변시초에게 차운하여 주다」를 보면, ‘昔年交契在皇州, 此日重逢碧海頭’라고 하였다. 전에 서울에서 만난 적 있었는데, 오늘 바닷가 영광 땅에서 다시 본다고 하였다. ‘聖代卽今多雨露, 願君休道逐臣愁’라고 하였다. 성대, 즉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즉위하여 지금 은혜(사면복권)가 많으니, 곧 해배될 것이니 축신, 즉 유배객이라고 신세를 한탄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 「변군 운에 차하여 重陽을 읊으다」를 보면, 바닷가 산봉우리에 올라간 것 같다. 총상인(聰上人)도 있었으니, 장소는 어느 절(구수사?)이었을 것 같다. 바다입구 흰 모래에 석양이 비추니 더욱 밝게 보이는 좋은 경치였다. 잔을 주고받아 취기가 오르자 시를 지었던 것 같다.
셋째, 수은과 죽창을 따랐던 사람들은 나중에 의병을 일으킨다. ①이괄의 난 때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사람들을 수록한 문건이 호남모의록이다. 여기에는 영광 출신으로 신유일, 신응순, 이극람, 정박, 이인영, 정전, 이홍겸, 이홍기, 이민겸, 정의달, 정제원, 이극찬, 이경운, 신응망, 강시윤, 정서, 정수, 신사효, 신종효, 이훤(李晅), 이휘(李暉), 신순거, 신엽, 신준, 정신달, 이돈, 이치순, 김섬, 김적, 박후립, 진효신 등이 수록되어 있다.
②정묘거의록을 보면,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켰던 영광인으로 강환(姜渙), 김여경(金餘慶), 김진(金瑱), 신유일(辛惟一), 신응순(辛應純), 이홍기(李弘記), 정전(丁錢), 정제원(丁濟元) 등이 있다.
③호남병자창의록을 보면,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영광인으로 이희웅, 김여옥, 이척, 이민겸, 이구, 송식, 김담, 강시억, 정명국, 강시만, 강시건, 이휘, 김경백, 김상경, 나통서, 박담련 등이 보인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총 48인이 창의에 나섰다. 이 가운데 강시건, 강시만, 강시억, 김담, 김상경, 김진, 송식, 신사효, 신엽, 신응망, 이극람, 이홍겸, 이훤, 이휘, 정명국, 정수 등 16인이 수은의 문인이거나 죽창에게 만사를 보낸 사람이다.
이 외에 무장의 강시언, 고창이 유철견, 고부의 김지수, 함평의 정색⋅정적 등도 수은⋅죽창의 지인들이다. 이렇게 보면, 정치적으로는 서인계인 수은⋅죽창의 지인들이 중심되어 인조 정권 아래에서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에 영광에서 의병을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5. 맺음말 : 수은과 죽창
죽창에게 수은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죽창 선생 사우 축문」을 지은 강진 출신의 동강 이의경(李毅敬, 1704~1778)은 죽창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면 그 친구를 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한사(寒沙, 신응망), 이송(二松, 김인흡), 성재(省齋, 신응순), 수은(睡隱, 강항) 등 4인을 들었다. 죽창이 이들 4인과 도의로 사귀었다고 하였다.
김영한(金甯漢, 1878~1950)이 지은 「지산강당중건기(芝山講堂重建記)」를 보면, 광해군의 정치가 혼란에 빠지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 강수은, 임명고 등의 선비들과 왕래하며 시를 주고받았다고 하였다. 비슷한 내용은 이종택(李鍾宅)이 지은 「지산강당중수기」에도 들어 있다.
이상을 보면, 객지에 새 터전을 잡은 죽창에게 수은은 매우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것 같다. 사실 만력33년(1605, 선조 38)에 작성된 영광 향안(鄕案)에 죽창은 들어가지 못하였고, 5년 뒤 향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영광 내 지인들은 모두 향안에 입록되어 있는 상황에서 죽창은 수은에게 크게 의지했을 것 같다. 이는 죽창이 보인당(補仁堂) 주인 김주천(金柱天)에게 준 연작시 속에 들어 있는 다음의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
나이 칠십 되가는데 친구는 없고(年來七十故人空)
수은은 어디 갔나 물만 동쪽으로(睡隱何歸水浙東)
오직 그대만 있어서 어울렸더니(唯有吾君同調友)
생각하니 응당 꿈에서나 만나겠지(相思應想夢魂通).
이 시는 죽창이 수은 사후 본인 말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다정한 친구 수은이 없음을 허전해하며 지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죽창 사우 상량문에 죽창이 가지산(歌芝山)에서 노래하면 강수은이 화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은과 죽창이 가까웠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로 생각된다. 또한 수은이 새 터전으로 일군 불갑면 운제(雲堤) 마을 이름을 죽창이 지어주었다는 문중 전언도 두 분 사이의 돈독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영광신문 발제문기사
<참고문헌>
거창읍지
김포시사
노사집(기정진)
동래정씨문집
석촌유고(임서)
선양재집(정희맹)
성경재집(정건)
성재집(신응순)
소은유고(신천익)
수은집(강항)
영광속수향안
영광읍지
은시록
익산군지
정묘거의록
죽창집(정홍연)
한정유고(임담)
호남모의록
호남병자창의록
김경숙, 「이괄의 난과 호남모의록」, 숭실사학 28, 숭실사학회, 2012.
김경옥, 「수은 강항의 생애와 저술활동」, 도서문화 35,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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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 「정묘호란과 호남의병」, 전쟁과 전라도 지역사, 선인,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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