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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 철학박사, 전, 조선대교수, 보성 대계서원 안방준선생의 직손
등록날짜 [ 2018년12월02일 15시41분 ]


1. 조선 중기의 학파들

 조선조 유학은 程朱의 道學을 수용하여 치밀한 개념 분석과 엄격한 실천 행위를 강조했는데, 특히 중기에 배출된 知的 巨人들을 중심으로 학문의 활동과 내용에서 일정한 연관성 혹은 공통성을 지닌 집단을 양산하였다. 이를 ‘학파’라고 부른다면, 花潭학파·退溪학파·南冥학파·栗谷학파는 이 시기를 대표한다.


  趙光祖(靜庵, 1482~1519)가 道學의 뿌리를 확고하게 내린 이후, 경기도 개성에서는 徐敬德(花潭, 1489~1546)이, 파주에서는 成渾(牛溪, 1535~1598)이, 황해도 해주에서는 李珥(栗谷, 1536~1584)가, 영남 동쪽에서는 李彦迪(晦齋, 1491~1553)이, 영남 북쪽에서는 李滉(退溪, 1501~1570)이, 영남 남쪽에서는 曺植(南冥, 1501~1572)이 학파를 형성하여 도학을 전수하였다.


호남에서도 북쪽에서는 李恒(一齋, 1499~1576)이, 남쪽에서는 金麟厚(河西, 1510~1560)와 奇大升(高峰, 1527~1572) 등이 독특한 학풍을 내세워 영향력을 발휘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이항·김인후·기대승 사후에도 17세기 초, 중반에 도학을 강론하여 제자들을 양성한 一群의 유학자들이 호남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예컨대 담양 대산의 金大器(晩德, 1557~1631), 영광 유봉의 姜沆(睡隱, 1567~1618), 임실 덕촌의 趙平(雲壑, 1569~1647), 보성 우산의 安邦俊(隱峯, 1573~1654)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호남의 유학이 기축옥사와 임진·정유왜란을 거치면서 점차 학문적 기반이 약화되고, 더구나 17세기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학인들이 경기와 호서지역으로 유학을 떠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강학의 촛불을 끄지 않았다.


  강항은 영광군 남쪽 불갑산 아래 유봉리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가까운 雲堤 마을로 이사했는데, 관직생활과 포로생활을 뺀 나머지 생애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강학하였다. 그는 팔대(八代) 문헌가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이미 뛰어난 문장 실력과 해박한 역사 지식을 인정받았고, 3년여의 포로생활 중에 보여준 탁월한 氣節은 일본인도 존경할 정도였다.


강항의 수제자 尹舜擧는 스승의 학행을 挽詩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아름답고 밝은 문장은 지금의 屈原이요, 추상같은 높은 절개는 옛날의 蘇武로다.” 그는 포로생활에서 탈출하여 귀국한 이후에도 죄인으로 자처하고 벼슬을 멀리한 채 스스로 불갑산에 갇혔다. 강항은 찾아주는 詩友들과 담론하는 한편 그의 문장과 기절을 흠모하여 찾아온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52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강항은 17세기 초반에 호남 유학을 이끈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간 강항에 대한 연구는 주로 시문학과 『看羊錄』, 일본에 유학전수 등 몇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으나, 아직까지 교사로서의 강학활동은 깊이 있게 탐색되지 못하였다.


필자는 강항에 대한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연구가 진행되려면, 그에게 영향을 준 스승들, 교유한 친구들,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관련 유적과 유물들까지, 그 학문적 연관성을 폭넓게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발표는 이러한 관심 하에 강항의 제자들에 관한 기초적인 정보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2. 牛溪학맥의 계승

 강항은 문과에 급제한 이듬해인 1594년(28세) 校書館 正字로 있을 때에 경기도 파주로 牛溪 成渾을 찾아가 기호유학의 한 맥인 우계학맥을 계승한다.

◎ 安珦(晦軒) → 權溥(菊齋) → 李穀(稼亭) → 李穡(牧隱) → 鄭夢周(圃隱) → 吉     再(冶隱) → 金叔滋(江湖) → 金宗直(佔畢齋) → 金宏弼(寒暄堂) → 趙光祖(靜     庵) → 成守琛(聽松)/白仁傑(休庵) → 成渾(牛溪) → 姜沆(睡隱) →

 성혼의 학문은 도학적 성격이 매우 짙은데 그것은 일상에 체질화되어있을 만큼 강한 실천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강항이 성혼의 문하를 찾았을 때, 그는 동인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정치적인 입지가 약화되어 제자들을 내보낸 채 은둔하고 있었다. 이러한 곤경을 잘 알면서도 자기의 문하를 찾아온 강항에게 성혼은 단아하고 진실한[端諒] 몸가짐을 가졌다고 칭찬했다. 


  강항은 왜 비교적 늦은 나이에, 그것도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져있던 성혼의 문하를 찾아갔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현재까지 전해져오는 성혼과 강항의 문집 속에서 이 물음을 해명할만한 자료를 거의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그 흔한 시 한 수, 편지 한 통, 제문 한 장, 어록 한 구절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메마른 자료 속에서 눈에 번쩍이는 글을 한 통 만나게 된다. 강항이 쓴 「坡山四賢書院察倫堂上梁文」이라는 글이다. 이 글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된 坡山書院의 察倫堂을 재건할 때 지은 상량문이다.


여기에서 강항은 파주지역은 魯나라처럼 현인이 많이 배출되어 학문 활동이 융성했던 곳임을 강조하고, 정주철학에서 발원한 조광조의 도학이념과 실천정신을 成守琛·成渾·白仁傑·李珥 등 네 현인이 이어받아 학행을 성취한 업적을 열거하고 있다. 이들 중 성수침과 백인걸은 조광조의 문인이고, 김굉필의 도통을 조광조가 잇고 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강항의 스승 성혼은 부친 성수침과 백인걸에게 학문적 영향을 깊게 받았고, 성혼의 道友 李珥는 성수침과 백인걸의 학행에 무한한 존경심을 표하였다. 이 서원은 네 현인이 김굉필­조광조 계통의 도학이념을 강론했던 신성한 공간이었는데, 강항이 성혼을 찾아가 수학했던 牛溪書室과는 지척의 거리에 있었다. 강항은 이 글의 말미에 자신의 소망을 다음처럼 피력하고 있다.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한 것[入孝出悌]으로 모든 행실의 근원을 삼고, 비근한 사물을 배운 뒤에 깊은 學理에 나아가는 것[下學上達]으로 평생의 일을 삼으며, 사방의 학생들이 모두 귀의할 곳으로 여기게 하고, 높은 벼슬아치와 백성들이 모두 본보기로 삼게 하며, 소인의 변덕을 배우지 말게 하고, 유학의 哲理를 이루게 하소서.

 강항은 ‘입효출제’와 ‘하학상달’이라는 유교의 윤리와 학문방법이 파산서원을 통해 끊임없이 강론되어 발현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서원의 中軸인 스승 성혼을 조선조 도학의 전통을 걸머진 학자로 여겨 한평생 귀의처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강항 자신의 도학에 대한 인식과 실현의 욕구가 강렬했기 때문에 그의 발걸음을 성혼의 문하로 옮기게 했고, 그 문하에서 수학함으로써 “道脈의 올바름을 얻어 마침내 大儒로 성장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3. 衛道정신과 道義실천

 강항이 태어날 무렵, 조선의 사상계는 성리학의 핵심 문제 곧 四端七情과 人心道心 등을 둘러싸고 李滉­奇大升, 成渾­李珥가 치열한 논변을 진행하여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미 거두고 있었으나, 강항은 이러한 성과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흔한 성리학의 용어들마저 추출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성리학의 이론을 철저히 분석하려는 학구적 태도에서 비껴서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강항이 성리학 세계에 대해 전혀 무관심했거나 무지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조선조의 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주자학의 經學的 철학체계로 훈련을 받았고, 강항의 학문 활동도 조선조 주류 학문인 주자학의 범주 속에서 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문집이나 일본에서 남긴 기록들을 살펴보더라도, 성리학의 주요 텍스트나 흐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성리학의 이론체계가 거의 결핍된 것에 비해, 강항의 道學에 대한 사유는 그 편린이나마 문집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다음은 강항의 道와 道學에 대한 사유를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道란 천하에 편재하여 소멸된 적이 없다.
중국이라 해서 남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외국이라 해서 부족한 것도 아니다. 오직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 드러내 밝히고 열어서 발현하기에 달려있을 뿐이다. 우리 동방에 나라가 선 지 유구하여 그 사이에 도량이 넓은 선비가 많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그 중 道學으로 명분을 삼아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앎의 극치에 이르고, 뜻을 참되게 하여 마음을 바로잡는 것[格致誠正]을 공부로 여기고, 군주를 존중하여 백성을 보호하는 것[尊主庇民]을 임무로 삼은 사람을 찾는다면, 겨우 몇몇이나 있을 정도이다.

 이 글은 강항이 호남 유생을 대표하여 李彦迪(1491-1553)을 공자 사당에 배향하기를 청하는 상소문의 첫 부분이다. 여기에서 강항은 지역과 민족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하는 道의 보편성을 시사하고, 탁월한 지혜를 갖춘 자들이 이를 천명하여 역사와 사회 속에서 진리를 실현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道를 자신의 학문으로 삼은 사람이라면, '대학'에서 제시한 조목을 따라 지식을 탐구하고 심성을 도야하는 공부를 수행하며, 이를 토대로 '資治通鑑'에서 말한 것처럼 관직에 나아가 자신의 포부를 펴서 세상을 구제하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는 道學을 내면의 도덕철학과 외면의 정치철학을 결부시켜 논의하려고 하는 사유의 한 단면을 잘 드러낸 대목이다. 


  강항에게 道의 표상은 경전과 역사서이다. 강항은 문인 辛思孝에게 보낸 편지에서 “道를 행하고 세상을 구제하며 군주를 보필하고 사람을 살리는 방도는 본래 典·謨·訓·誥를 놓아두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하여, 중국 고대에 역대 제왕들의 정치철학이 들어있는 󰡔서경󰡕의 중요성을 일깨웠고, 맹자의 ‘호연지기’나 曾點의 ‘詠歸’하는 뜻도 六經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지 억지로 짜내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며, 또한 詞章을 통한 과거시험 응시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六經을 방치하고 앞사람의 문장에서 尋章摘句하거나 표절이나 일삼는 것은 유학자가 할 일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 강항에게 六經에 기반을 둔 經學은 유학자라면 반드시 걸어야할 최선의 길이요 최고의 강령이었던 셈이다.


다시 말하면 육경은 비록 고대에 형성된 경전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진리는 그것 속에 더욱 명료하게 나타나있기 때문에, 고전의 학습을 통해서 인간의 내면과 사회현실을 조화하고 통일시킬 수 있는 표준이요 원천이 되는 것이다.


  강항은 경전 공부에 못지않게 역사서의 학습을 중시했다. 강항의 뛰어난 문인 尹舜擧(1596-1668)는 󰡔綱鑑會要󰡕(강항의 역사 저술, 17권 19책)의 서문에서 스승의 학문을 “경학에 근본을 두고 사학에서 참조했으며, 먼저 이치를 인식한 뒤에 문장으로 나아갔다”고 요약하고, 이 저술의 가치를 평론하여 “󰡔資治通鑑󰡕에 비교하면 겨우 5분의 1정도의 분량이지만 참으로 미묘한 뜻을 밝혀낸 定案이요 크게 완성한 良史이니 온 나라가 공유해야만할 것이다”고 극찬했다.


8세 무렵에 이미 '通鑑綱目'에 통달하여 茂長지역에 ‘綱目村’이 있을 정도였는데, 그렇다면 강항이 이처럼 역사서를 즐겨 읽은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는 문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史學은 반드시 판단에 밝고 治亂에 통달해야 한다. 말하고 듣는 자료로만 활용하여 몸과 마음에 무익한 것은 우리 道가 아니다. 대개 글자가 만들어진 이후 곧 역사가 있었으니, 역사가 아니면 성인의 발자취를 고증하고 옛일을 징험할 수 없다.” 강항이 역사를 연구한 주목적은 과거의 사실 중에서 기억해둘 가치가 있는 사례와 피해야할 사례를 찾아내어 현실정치의 선악을 판별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통찰을 얻는 데 있었다. 그가 역사에서 얻고자 했던 道의 모습은 유희적인 관념이 아니라, 현실을 이끌어주는 실제적인 사례와 본보기였던 것이다.



  유학이 제시한 도덕준칙을 따라 正道를 걷는 삶을 살고자한 강항의 신념과 의지는 이른 시기에 확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항은 9세에 지은 「幼成若天性賦」에서, 어려서부터 성인의 교훈에 입각하여 심성의 근원을 밝혀 천성의 덕을 바르게 배양해야 군자가 된다는 관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讖緯策」에서는 緯說이 경전을 어지럽히고 妖言이 대중을 현혹시키는 폐단을 경계한 뒤, 그 원인을 道가 미약하고 교화가 밝지 못한 데서 찾아, 오래 전부터 이러한 사악한 언행을 배격하여 ‘옛 성인의 道를 지키기로[閑先聖之道]’ 다짐했음을 밝히고 있다. 강항은 道를 지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다음처럼 말했다.
 

군주가 위에서 중심을 잡아 기준을 세우고 안으로 정밀히 살피고 오롯한 마음을 지녀, 六經을 드러내 밝히고 百家를 배격하되, 六藝의 설명이나 孔子의 학술과 관계없는 것들을 단호히 차단할 수 있다면, 교화가 곧 밝아지고 풍속이 저절로 바르게 되며, 집집마다 孔孟을 이야기하고 방마다 鄒魯를 전하게 되며, 선비가 先王의 法言이 아니면 감히 말하지 않고 聖人의 正經이 아니면 감히 읽지 않게 될 것이니, 九流·七略의 책이나 雜家·衆技의 학문은 대낮의 무지개요 한여름의 우박일 뿐이다.

 강항도 한때는 博學을 추구하여 경전과 史書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서·천문·지리·篆刻 등을 두루 연구하여 獨得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용문에서 보듯이 강항은 자기 성찰을 거쳐 六經과 六藝로 회귀하여 孔孟의 근본정신을 국가와 사회에 실현하려는 강인한 신념을 키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강항은 포로생활 중에 만난 친구 宋檣에게 준 편지에서 “점술가의 책들이 서로 모순이 많아 열에 예닐곱은 틀린 것을 보고 그 책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운명의 길흉이야 이미 태어날 때에 정해져있는 것이니, 正道에 몸을 두어 正命을 받을 뿐이다”고 말하여, 자신의 체험을 통해 점술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正道에 의탁하는 삶을 선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강항이 자기 성찰의 체험을 통해 緯說의 기만과 결별하고 六經의 正道로 복귀하게 되는 하나의 실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강항의 道에 대한 인식과 관련시켜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개념은 義이다. '주역'에서는 “군자는 경건함으로써 속을 곧게 하고 의로움으로써 밖을 바르게 한다[義以方外]”고 하여 義가 내면의 곧음을 근거로 외면을 바르게 하는데 까지 관철시키는 원리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맹자가 梁惠王 앞에서 이익을 거부하고 의리를 내세웠을 때의 義는 세속적 가치를 부정하는 칼날의 예리함을 지니는 것이었다.


강항은 억류생활 중에 포로로 잡혀온 조선인들이 일본에 귀화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그들의 부당성을 알리는 격문 속에서 “(공자가) 管仲이 아니었다면 左袵할 뻔했다고 말한 것은 모두 왕도를 존중하고 이적을 물리친다[尊王攘夷]는 뜻을 알게 함이니, 멀리 남의 나라에 귀화하려 하지 말고 세 번 사는 것보다는 ‘義가 소중함’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여,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義라는 고귀한 윤리적 가치임을 밝히고 있다.


흔히 道義라고 불리는 것처럼, 강항의 관념 속에서도 義는 유학의 진리[道]와 이상[善]을 다양하게 변화하는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할 때에 나와 타인을 관철하는 보편적인 원리가 되는 동시에 正과 邪를 가르는 분별의 원칙이 되고 있는 것이다.


  4. 강학활동과 제자들

 강항은 우계 성혼의 학맥을 계승하여 강인한 道義 정신으로 무장한 관료학자였다. 그는 왜란 중인 1593년(27세)에 광해군이 전주에 주둔하면서 시행한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28세에 교서관 정자, 춘추관 기주관을 거쳐 29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고, 30세에 성균관 전적으로 옮겼다가 공조좌랑을 거쳐 형조좌랑이 되었다.


1597년(31세) 여름에 이광정의 종사관이 되어 군량을 모집했으나 남원성이 함락되어 영광 앞바다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1600년(34세) 5월에 포로에서 풀려 부산에 도착한 뒤 선조 임금을 뵙고 고향으로 돌아와 칩거에 들어갔다. 강항은 포로의 신분이었으나 조선 선비의 기개를 잃지 않고 관료로서 일본의 정치 동향과 지리 환경 등을 조정에 보고했으나, 동인들의 비방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한 때 포로였다는 자괴감을 떨치지 못했다. 
 

1600년 9월에 고향으로 돌아온 강항은 대구교수와 순천교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함으로서, 관직생활을 통해 자신의 도학을 구현하려던 꿈을 스스로 접어버렸다. 대신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운제 마을의 서당에서 집안과 향촌의 자제들, 친구들의 자질들을 받아들여 강학활동을 시작하였다. 강항은 이곳에서 다수의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그의 뛰어난 문장과 고고한 기절은 제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강항은 일본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 藤原惺窩(1561~1619, 후지하라 세이카)와 赤松廣通(1562~1600, 아카마쓰 히로미치)에게도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맡은 적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논외로 한다.]


   그러나 현재 강항의 문집에는 정돈된 제자들의 명부인 ‘門人錄’이 실려 있지 않아 학맥의 전승과 교육의 파급 정도를 가늠하는 데 방해가 된다. 근 20여 년간 강학활동을 하면서 다수의 제자들을 배출했을 터인데, 아직까지 이렇다 할 ‘문인록’이 문집에 실리지 않은 점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다행히 근래에 강항의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들의 정보를 알려주는 일종의 ‘문인록’들이 성첩 문서 형태로 발견되고 있다. 


  첫째, 1824년에 후손 姜台煥이 작성한 『誾侍錄』(종손 강진성 소장)이다. 강태환은 발문에서, 일찍이 『晉山世考』를 기록하다가 제자들의 후손가에 탐문하기도 하고 『수은집』 속에서 뽑아 적어서 삼가 명단을 만든다고 하였다. 이 문서에는 제자로 추정한 69명의 성명, 字號, 과거시험, 관직, 본관 등 짧은 정보를 기록해 두었다.


  둘째, 작자 미상의 『수은문인록』(필자가 임의로 붙임, 후손 강재원 소장)이다. 이 기록 역시 성첩 문서인데 아쉽게도 앞쪽 몇 장이 떨어져 나갔다. 누락부분을 빼고 62명의 성명, 자호, 과거시험, 관직, 거주지 등이 적혀 있고, 그 뒷부분에 제자들이 스승을 위해 지은 挽詩와 스승이 제자들에게 준 시와 만시를 『수은집』 원집과 부록, 별집에서 뽑아 사제 관계임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제 관계라고 확증할 수 없는 글들도 많이 추출이 되어 있다.  


  셋째, 1941년에 윤영선이 편찬한 『朝鮮儒賢淵源圖』(동문당 간행)이다. 윤영선은 강항을 성혼의 학맥에 배열하고 그 문하에서 배출된 것으로 추정한 41명의 성명, 호, 본관, 관직과 품계, 생년 등을 나열하였다. 윤영선은 호남의 읍지를 위주로 강항의 제자들을 추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세 가지 자료는 모두 강항 사후 2, 3백년 뒤에 작성된 것들이다. 아직 정돈되지 않은 기초적인 문서이지만 문집에 문인록이 실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나마 소중한 자료들이다. 세 자료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가나다순으로 정리하면 많은 숫자가 겹치는데 대략 85명 정도 된다. 그러나 앞으로 좀 더 세밀하게 방증자료를 대조해 보면 이 중에 강항의 제자로 볼 수 없어 삭제해야 할 인물이 약 2, 30명 정도 될 것으로 판단한다. 아래에서 인명에 밑줄을 친 인물들은 선, 후배이거나 동문, 친구, 벗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1) 강락(姜洛) :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호는 만은(晩隱)이다. 임진왜란에 의병장 고경명과 최경장에     게 의병과 군수품을 모아 보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2) 강시견(姜時見) : 1589~?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선세(善世)이다. 진사?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3) 강시량(姜時亮) :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비명(丕明)이며 호는 취송정(翠松亭)이다. 진사?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 강시만(姜時萬) :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호는 동강(東岡)이다. 강항의 아들이며 참봉에 제수되었다. 병자호란에 창의하였다. (연원도에 보임)
5) 강시억(姜時億) : 1600~?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천뢰(天賚)이다. 강준(姜濬)의 아들이고 강항의 조카이다. 163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교관과 찰방을 지냈다. 병자호란에 창의하였다. 영광, 순천에 거주하였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6) 강시언(姜時彦) :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백영(伯英), 호는 하월당(荷月堂)이다. 강계오(姜繼吳)의 아들이며 무송(茂松)에서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 강시열(姜時說) : 1625~?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은경(殷卿)이며, 호는 죽은(竹隱)이다. 강영(姜泳)의 아들이며 1651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연원도에 보임)

8) 강시회(姜時晦) :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강항의 종질이다. 진사?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9) 강영(姜泳) : 1574~?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양원(養元)이며 호는 시시당(是是堂)이다. 강항의 아우이다. 1613년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영광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0) 고부립(高傅立) : 본관은 장택(長澤)이고 자는 군회(君晦)이다. 고종후(高從厚)의 아들이며 경기 전참봉에 제수되었다. 정묘·병자호란에 창의하였고 광주에 거주했다. (은시록에 보임)
11) 고부민(高傅敏) : 1577~1642. 본관은 장택(長澤)이고 자는 무숙(務叔)이며 호는 탄음(灘陰)이다. 고성후(高成厚)의 아들이며 문집으로 『탄음고(灘陰稿)』가 있다. 광주에 거주했다. (연원     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2) 구용(具容) : 1569~1601.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자는 대수(大受)이며 호는 죽창 (竹窓)이다. 부친은 구사맹(具思孟)이며 1590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김화현감(金化縣監)을 지냈다. 『죽창유     고』가 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3) 김경철(金景哲) : 1573~?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윤보(允甫)이며 호는 은송당(隱松堂)이다. 부친은 김상(金常)이며 남원교수(南原敎授)에 제수되었다. (연원도에 보임)

14) 김기(金夔) : 본관은 서흥(瑞興)이고 호는 죽헌(竹軒)이며 강항의 사위이다. (연원록,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5) 김남수(金楠壽) : 본관은 상산(商山)이고 자는 등로(滕老)이다. 임진왜란에 종사관으로 출정했으며 영광 불갑 원당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6) 김담(金䃫) : 1599~? 본관은 영광(靈光)이고 자는 백석(伯石)이며 호는 백산(栢山)이다. 병자호란에 창의하였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7) 김덕수(金德秀) : 1548~?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득심(得心)이다. 부친은 김적(金適)이며1576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무안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8) 김상경(金尙敬) : 본관은 상산(商山)이고 자는 질부(質夫)이며 호는 죽재(竹齋)이다. 병자호란에 창의하였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19) 김상돈(金尙敦) :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김상경(金尙敬)을 잘못 쓴 듯하다. (문인록에 보임)
20) 김약여(金躍麗) : 본관은 상산(商山)이고 호는 원당(圓堂)이다. 부친은 김남수(金楠壽)이며 영광 원당(元塘)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21) 김여경(金餘慶) : 1577~? 본관은 영광(靈光)이고 호는 창주(滄洲)이며 참봉에 제수되었다. (연원도에 보임)
22) 김우급(金友伋) : 1574~1643.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사익(士益)이며 호는 추담(秋潭)이다. 부친은 김대성(金大成)이며 161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목릉참봉에 제수되었다. 변이중(邊以     中)의 문인이고 문집으로 『추담집(秋潭集)』이 있다. 장성 황룡에 거주하였다. (은시록, 문인록     에 보임)
23) 김이강(金以剛) : 본관은 영광(靈光)이다. (연원도에 보임)
24) 김정발(金廷潑) :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호는 계암(桂菴)이다. 임진왜란에 창의하였다. (연원도에 보임)
25) 김지수(金地粹) : 1585~1639.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거비(去非)이며 호는 태천(苔川) 이다. 조부는 김제민(金齊閔)이며 1616년 문과에 급제하고 종성부사를 지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고 『태천집(苔泉集)』이 있다. 고부에서 거주하였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26) 김진(金瑱) : 1599~?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미중(美仲)이며 호는 간촌(簡村)이다. 부친은 김인택(金仁澤)이며 1635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사복시 정에 제수되     었다. 영광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27) 나봉서(羅逢緖) : 1570~? 본관은 금성(錦城)이고 자는 언장(彦章)이며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다. 부친은 나덕전(羅德全)이고 증조는 나세찬이다. 1609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영광 삼서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28) 나준서(羅遵緖) : 본관은 금성(錦城)이고 부친은 나덕전(羅德全)이며 나통서의 아우이다. 진사?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29) 나통서(羅通緖) : 1572~1637. 본관은 금성(錦城)이고 자는 사장(士章)이며 호는 계봉(桂峰)이다. 부친은 나덕전(羅德全)이고 나봉서의 아우이다. 1603년 무과에 급제하고 경성판관에 제수되     었다. (연원도에 보임)


30) 나해구(羅海龜) : 1581~1660.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응주(應疇)이며 호는 석호(石壕)이다. 부친은 나덕양(羅德讓)이고 나해봉의 형이다. 나주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31) 나해륜(羅海崙) : 1583~1659.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응숙(應淑)이며 호는 송도(松島)이다. 부친은 나덕겸(羅德謙)이며 1624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효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이괄의 난     과 병자호란에 창의했으며 문집으로 『송도유적(松島遺蹟)』이 있다. 나주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32) 나해봉(羅海鳳) : 1584~1638.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응서(應瑞)이며 호는 남간(南磵)이다. 부친은 나덕양(羅德讓)이며 160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경기전참봉, 별제(別提)에 제수되었     다. 『남간집(南磵集)』이 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33) 민희(閔喜) :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자는 자우(子愚)이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34) 박륜(朴淪) :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적혀 있으나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없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35) 박숙(朴俶) : 1609~1674. 본관은 무안(務安)이고 자는 여발(汝發)이며 호는 용와(龍窩)이다. 부친은 박제(朴悌)이다. (연원도에 보임)
36) 박안제(朴安悌) : 1590~1663.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계심(季心)·계순(季順)이며 박안효의 아우이다. 1621년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영광군수, 병조참의를 지냈다. 묘는 예산현(禮山縣) 돈절리(敦節里)에 있고, 후손은 충청도 영동 거주했다. (은시록에 보임)

37) 박안효(朴安孝) : 1587~?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백심(伯心)·인백(仁伯)이며 부친은 1603~1608년에 영광군수를 지낸 박정현(朴鼎賢)이다. 1616년 문과에 급제하고 남원부사, 전라도도사를 지냈다. (은시록에 보임)

38) 박호(朴濠) : 1586~?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백유(伯遊)이다. 부친은 박동열(朴東說)이며 김장생의 제자이기도 하다. 1609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39) 반여경(潘汝慶) : 1600~?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자는 백유(伯有)이며 호는 연강(硯江)이다. 부친은 반정(潘淨)이며 1624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장성에 거주했다. (연원도에 보임)

40) 변충원(卞忠元) : 1568~? 본관은 초계(草溪)이고 자는 신초(藎初)이며 호는 강음(江陰)이다. 부친은 변희겸(卞希謙)이며 160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경기도 부평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     에 보임)
41) 변효윤(邊孝胤) : 본관은 황주(黃州)이고 자는 자원(子元)이다. 부친은 변이중(邊以中)이며 장성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2) 송식(宋軾) : 본관은 신평(新平)이고 자는 여첨(汝瞻)이며 호는 발산(鉢山)이다. 송흠(宋欽)의 5대손이며 병자호란에 창의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3) 신사효(辛思孝) : 본관은 영월(寧越)이고 자는 공칙(公則)이며 호는 회우(晦迂)이다. 부친은 신응순(辛應純)이며 영광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4) 신엽(辛曄) : 1598~? 본관은 영성(靈城)이고 호는 도은(桃隱)이다. 부친은 신유일(辛惟一)이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5) 신응망(辛應望) : 1595~1654. 본관은 영산(靈山)이고 자는 희상(希尙)이며 호는 한사(寒沙)이다. 부친은 신장길(辛長吉)이며 1624년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장령, 파주목사를 지냈다. (연원도에 보임)

46) 신천익(愼天翊) : 1592~1661. 본관은 거창(居昌)이고 자는 백거(伯擧)이며 호는 소은(素隱)이다. 증조는 신희남(愼喜男)이고 부친은 신인(愼諲)이다. 1612년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부제학, 이조참판을 지냈다. 『소은유고』가 있다. 조찬한(趙纘韓)의 문인이며 영암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7) 신해익(愼海翊) : 1592~1616. 본관은 거창(居昌)이고 자는 중거(仲擧)이며 호는 병은(病隱)이다. 신천익과 쌍둥이 형제이다. 1613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예조좌랑을 지냈다. 흥덕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8) 신희상(辛希尙) : 희상은 앞쪽에 나오는 신응망(辛應望)의 자(字)이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49) 심광세(沈光世) : 1577~1624.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자는 덕현(德顯)이며 호는 휴옹(休翁)이다. 조부는 심의겸(沈義謙)이고 부친은 심엄(沈俺)이다. 1601년 문과에 급제하고 부안군수,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휴옹집』이 있다. (은시록에 보임)
50) 안희적(安希勣) : 1587~1626.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자는 무중(懋仲)이며 호는 권유자(倦遊子)이다. 함평 나산에 거주했다. 진사?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51) 양만용(梁曼容) : 1598~1651. 본관은 제주(濟州)이고 자는 장경(長卿)이며 호는 오재(梧齋) 또는 거오(據梧)이다. 부친은 양산축(梁山軸)이며 1633년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지냈으며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봉해졌다. 『오재집』이 있으며 박동열의 문인이기도 하다. (연원     도, 은시록에 보임)
52) 양인우(梁仁宇) : 본관은 제주(濟州), 호는 낭호당(朗湖堂)이다. (연원도에 보임)
53) 오정남(吳挺男) : 1563~1626.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자영(子英)이다. 부친은 오천수(吳 天壽)이며 1610년 생원시에 합격했다. 『연강집(蓮江集)』이 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54) 오희도(吳希道) : 1583~1623.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득원(得原)이며 호는 명곡(明谷)이다. 부친은 오언표(吳彦彪)이며 1623년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명곡유고』가     있고 창평에 거주하였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55) 오희일(吳希一) : 1578~1604.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백원(百原)이다. 고인후의 사위이고 오희도의 형이다. 나주 도림(道林)에 거주했다. (연원도에 보임)

56) 오희일(吳喜馹) : 본관은 낙안(樂安)이며 귀호정(龜湖亭)을 세웠다. 나주 남평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57) 유지원(柳之元) : 진사라고 하는데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58) 유흥세(柳興世) : 1589~? 본관은 고흥(高興)이고 자는 기지(起之)이다. 회동(會洞)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59) 윤순거(尹舜擧) : 1596~1668.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노직(魯直)이며 호는 동토(童土)이다. 부친은 윤황(尹煌)이며 1633년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금구현령, 영월군수를 지냈다. 김장생의 문인이기도 하며 『동토집』이 있다. (은시록에 보임).

60) 윤민헌(尹民獻) : 1562~1628.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익세(翼世)이며 호는 태비(苔扉)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609년 문과에 급제하고 전라도 도사, 공조참의를 지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61) 윤훈거(尹勛擧) : 1591~1639.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백용(伯庸)이다. 윤순거의 형이며 고산현감, 사축서별좌를 지냈다. (은시록에 보임)
62) 이덕현(李德顯) : 본관은 양성(陽城), 함평 장동에 거주했다. (문인록에 보임)

63) 이덕형(李德亨) : 본관은 양성(陽城)이고 함평 장동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64) 이덕후(李德厚) : 본관은 양성(陽城)이고 함평 장동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65) 이란(李灤) : 1582~1628.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자하(子河)이다. 부친은 이규빈(李奎賓)이며 1613년 무과에 급제하고 전라우수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영광 남산에 거주했     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66) 이상원(李尙元) : 1597~?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순경(舜卿)이며 호는 제월정(霽月亭)이다. 부친은 이설(李渫)이며 1624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연원도에 보임)
67) 이소(李昭) :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부친은 이홍간(李弘諫)이며 강항의 사위이다.     생원?(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68) 이안눌(李安訥) : 1571~1637.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자민(子敏)이며 호는 동악(東岳)이다. 1599년 문과에 급제하고 담양부사, 예조판서를 지냈다. 『동악집(東岳集)』이 있다. (은시      록, 문인록에 보임)

69) 이율(李瑮) :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자는 문진(文縝)이며 호는 오휴(五休)이다. 이은(李誾)의  증손이며 영광 보촌서원에 배향되었다. 『오휴당유고』가 있고 보촌(甫村)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0) 이장(李壵) : 1594~?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농아(聾啞)이다. 조부는 이응종(李應鍾)이며 병자호란에 창의했다. (연원도에 보임)
71) 이전(李㙉) : 1583~?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초당(草堂)이다. 벼슬은 충위(忠衛)이고 능주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2) 이진명(李晉明) : 본관은 양성(陽城), 함평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3) 이춘영(李春英) : 1563~1606.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실지(實之)이며 호는 체소재(體素齋)이다. 부친은 이윤조(李胤祖)이며 1590년 문과에 급제하고 예천군수를 지냈다. 성혼(成渾)의 문인이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체소집(體素集)』이 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4) 이홍간(李弘諫) : 1574~?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자는 사직(士直)이다. 부친은 이옥(李玉)이며 조부는 이만영(李萬榮)이다. 161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찰방에 제수되었다. 남산에 거주했다.(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5) 이홍심(李弘諶) :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자는 백신(伯信)이다. 부친은 이곤(李琨)이며 조부는 이장영(李長榮)이다. 남산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6) 이홍열(李弘說) : 1603~?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자는 사필(士弼)이며 호는 우수(迂叟)이다. 부친은 이광(李珖)이며 조부는 이만영(李萬榮)이다. 찰방에 제수되고 남산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7) 이훤(李晅) :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부친은 이홍간(李弘諫)이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8) 이휘(李暉) : 1597~?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자는 국서(國舒)이다. 부친은 이홍간(李弘諫)이며 164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영광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79) 임련(林堜) : 1589~1648.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동야(東野)이며 호는 한호옹(閑好翁)이다. 부친은 임서(林㥠)이고 임담의 형이다. 사헌부장령, 우승지를 지냈다. (은시록에 보임)

80) 임담(林墰) : 1596~1652.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재숙(載叔)이며 호는 청구 (淸臞)이다.  부친은 임서(林㥠)이며 1635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판서를 지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며 박동열의 문인이기도 하다. (연원도, 은시록에 보임)

81) 정덕원(鄭德遠) : 누구인지 모르겠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82) 정수(丁燧) : 본관은 영광(靈光)이고 호는 영모정(永慕亭)이며 의병을 모집하였다.(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83) 정제원(丁濟元) : 1590~1647. 본관은 영성(靈城)이고 자는 백인(伯仁)이며 호는 취우당(醉愚堂)이다. 부친은 정건(丁鍵)이며 김장생의 문인이기도 하다. 『취우당집』이 있다. 정묘호란에 창의하였고 영광 용두(龍頭)에 거주했다. (연원도,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84) 정협(丁鋏) : 1565~1618. 본관은 영광(靈光)이고 자는 자장(子長)이며 호는 성경재(誠敬齋)이다. 정건(丁鍵)이라고도 한다. 부친은 정희맹(丁希孟)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성경재집』이 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85) 최계조(崔繼祖) : 본관은 삭녕(朔寧)이고 자는 비승(丕承)이다. 부친은 최준문(崔濬文)이다. 성혼의 문인이다. 남원에 거주했다. (은시록, 문인록에 보임)

  앞으로 많은 고증과 증보 과정을 거쳐 강항의 제자를 정돈해 간다면 좀 더 충실한 문인록이 작성될 것으로 기대한다. 우선 강항의 제자로 볼 수 있는 60여명만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먼저 지역적으로 보면, 강항의 제자들은 호남과 충청도 일부 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그가 20여 동안 강학했던 거점을 영광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함평과 나주 출신의 제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특기할만한 사항은 강항의 제자 중에는 강항 사후에 발발한 정묘·병자호란에 창의하여 구국의 깃발 아래로 달려간 실천적 유학자가 매우 많았다는 점이다. 제자들이 스승의 道義 정신과 氣節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된다.


  과거 합격의 숫자로 보면, 소과에 응시하여 생원·진사에 오른 제자들이 20여 명이고, 대과에 급제한 제자들도 7, 8명 되며, 관직에 진출하여 고위직에 오른 제자도 적지 않다. 문집을 내지는 못했지만 관료로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박안제·박안효 형제와 신응망, 임련과 임담 형제는 향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야할 것이다.


 
문집의 유무로 보면, 현재까지 약 9명의 제자들이 남긴 9종의 유고가 간행되었다.
고부민의  『灘陰稿』, 나해륜의 『松島遺蹟』, 나해봉의 『南磵集』, 신천익의 『素隱遺稿』, 양만용의 『梧齋集』, 오희도의 『明谷遺稿』, 윤순거의 『童土集』, 이율의 『五休堂遺稿』, 정제원의 『醉愚堂集』은 앞으로 강항과 그 제자들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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