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590년 2월28일에 선조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헌부례(獻俘禮 포로를 바치는 의식)를 거행했다. 진도 사람 사을화동(沙乙火同)이 왜구의 향도(嚮導) 노릇을 해왔는데 일본 사신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 義智)가 조선의 요구에 의해 잡아왔다.
일본 사신은 선조에게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면서 공작새 한 쌍과 조총(鳥銃)을 바쳤다. 그런데 선조는 조총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군기시에 보관토록 지시했다.
1543년에 일본 규슈 근처의 종자도에 도착한 포르투갈 상인이 종자도 영주에게 조총을 바쳤다. 이 신무기는 일본각지로 퍼져 기존의 전투양상을 바꾸었다. 조총의 위력을 실감했던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수 양성에 진력했다. 그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조총으로 최강의 기마군단 다케다 가쓰요리를 이겼다. 노부나가는 3교대 연속 사격 전술을 썼다. 조총의 장전 시간이 꽤 걸리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조총수를 3열로 배치시켜 연속 사격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노부나가는 1582년에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역으로 교토 혼노시(本能寺)에서 자결했다. 노부나가의 심복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는 당시에 원정 중이었는데 노부나가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회군하여 교토의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토벌했다. 1585년에 히데요시는 관백이 되고 1590년에는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일본을 통일했다.
#2. 1592년 2월에 선조는 신립과 이일을 파견하여 각 도의 병기를 점검토록 했다. 신립은 경기도와 황해도로, 이일은 전라도와 충청도로 갔다가 한 달 뒤에 돌아왔는데, 그 점검이라는 것이 활·화살·창과 칼뿐이고 대포나 화약은 없었다. 그나마 장부로 점검할 뿐이었다.
신립은 1583년 온성부사일 때 여진족을 무찔러 명성이 높았는데 잔인하고 난폭하다는 평판이 자자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자기의 위엄을 세웠다. 수령들은 신립을 두려워 해 백성들을 동원해 길을 닦았으며 극진히 접대했다. 대신의 행차도 이만 못했다.
1592년 4월1일(임진왜란 발발 13일전)에 신립은 선조 임금께 복명한 뒤 류성룡를 찾았다. 류성룡은 신립과 국방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징비록』에 나온다.
“멀지 않아 변고가 생기면 공이 마땅히 그 일을 맡아야 할 텐데 공의 생각으로는 오늘날 적의 형세로 보아 그 방비가 충분하나요?”
내 물음에 신립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예전에는 왜적이 창·칼만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조총과 같은 우수한 병기가 있으니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요”
신립은 황급히 “비록 조총이 있다고는 하나 그 조총이라는 게 쏠 때
마다 사람을 맞힐 수 있겠습니까?”
내가 다시 말했다. “태평세월이 너무 길었소. 그래서 병사들은 겁이 많고 나약해졌으니 급변이 일어날 때 그에 항거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외다. 내 생각으로는 몇 해 뒤 사람들이 군사 일에 익숙해진다면 난리를 수습할 수 있겠으나 지금 같아서는 매우 걱정스럽소.”
그래도 신립은 전혀 반성하거나 깨달은 기미 없이 돌아갔다.
(김문수 엮음, 류성룡 지음, 징비록, p 48-49)
#3. 1592년 4월28일 신립이 충주 탄금대에서 패하여 전사했다. 신립은 험준한 요새 조령을 지키지 않고, 기마병이 싸울 수 있는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그러나 기마병이 조총으로 단련된 왜군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4월28일 저녁에 선조는 신립의 패전 소식을 접했다.
4월30일 새벽에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개성으로 도망쳤다. 이를 보고 성난 백성들은 경복궁과 창덕궁에 불을 지르고 장예원의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5월3일에 왜군은 한양에 무혈 입성했다. 왜군이 부산 땅을 밟은 지 20일만이었다.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조임금의 무능, 집권당 동인과 김성일의 잘못된 정세 판단, 일본에 대한 무지, 그리고 장수들의 오만이 조선을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국가는 안전한가? 정의롭고 청렴한가? 경제는 국가비상사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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