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지식백과] 강회백 [姜淮伯]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
2)조선 시대 서울이나 지방에서 호적이나 기타 공공 사무를 맡아보던 사역(使役)의 하나.
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처화(處化), 호는 소태산(少太山). 원불교에서는 대종사(大宗師)라고 부른다. 1891년 5월 5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용리영촌(永村)에서 아버지 박성삼(朴成三)과 어머니 유정천(劉定天)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났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릴 때부터 영민하고 범상하지 않았으며 신의가 있고 탐구적인 소년이었다. 박중빈은 7세 때에 청명한 하늘을 보고 우주·자연 현상에 대한 의문을 품었으며, 인간의 생사와 존재문제까지 확장시켜 나갔다.11세 때 시향제(時享祭)에 참여하였다가 산신의 권능에 대해 듣고, 자신의 의문을 풀어줄 대상으로 산신을 만나기 위하여 ‘마당바위’에서 4년 동안 산상기도를 올렸다.15세 때 영광군 군서면 마읍리의 양하운(梁夏雲)과 혼인하고, 이듬해 정월에 신년 인사차 처가에 갔다가 고대소설 ≪조웅전 趙雄傳≫ 등에 나오는 도사 이야기를 듣고, 도사를 만나기 위하여 20세까지 정성을 다하였다.
20세에 구도행각의 후원자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구도의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마음 깊이 자리잡은 숱한 의문들은 ‘장차 이 일을 어찌할꼬?’ 하는 한 가지 생각으로 뭉쳤다. 25세 때부터는 이 생각마저 잊고 모든 것을 떠나 삼매의 경지로 가는 일체 돈망(頓忘)의 대정(大定)에 들었다가, 26세 되던 1916년 4월 28일 새벽에 대각(大覺:큰 깨달음)을 이루었다. 원불교에서는 이날을 ‘개교일(開敎日)’로 정하고 있다. 그는 대각의 안목으로 당시의 사회현상과 인류의 장래를 관조한 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내걸고, 물질문명에 끌려가는 인류의 정신구원을 위한 종교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교단창립과 사회개혁의 첫 사업으로 그를 따르는 아홉 제자와 함께 1917년 저축조합을 만들어
허례폐지·미신타파·금주금연·근검저축 운동을 펼쳤다. 거기서 모아진 자금으로 1918년에 간척사업에 착수하였다.<중략>그는 교단 창업의 기본계획을 36년 1대로 잡고 이를 다시 12년씩 3회로 나누어, 제1회는 경제기반확립, 제2회는 교서정비, 제3회는 인재양성에 역점을 두었다.일제 말기에 불법연구회가 민족단체로 지목받아 극심한 탄압 속에서 교단 존폐위기에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그 위기를 넘게 하는 계기를 삼도록 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박중빈 [朴重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