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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이토 등 주류세력 ‘메이지 14년 정변’이끌어
등록날짜 [ 2019년04월15일 12시03분 ]
1873년 10월의 ‘정한론 정변’은 이와쿠라 도모미와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의 승리로 돌아갔다. 패배한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도 신페이 등은 사직하고 낙향했다.

낙향 후 새로운 돌파구를 찾던 이타가키, 고토, 소에지마, 에도는 1874년 1월에 애국공당(愛國公黨)을 조직하고, 신문도 발행하기 시작했다. 애국공당은 ‘통의권리(通義權利)’를 이념으로 삼았고 목표는 민선의원(民撰議院 즉 국회) 개설이었다.

통의권리는 ‘하늘이 인민에게 공평히 준 것으로 사람의 힘으로 빼앗을 수 없는 것’이라는 자유사상가들의 천부인권이었다. 1874년 1월17일에 이타가키, 고토, 소에지마, 에도를 비롯한 전 도쿄지사 유리 기미마사 등 8명은 「민선의원설립건백서(民撰議院設立建白書)」를 태정관 좌원(左院)에 제출했다.

이들은 건백서를 통해 일부 인사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것을 ‘유사 전제(專制)’라고 비판하면서 민선의원을 개설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건백서는 메이지 천황에게 보고되지도 않고 기각되었다.

건백서가 기각된 후 애국공당 인사들은 둘로 갈렸다. 한쪽은 ‘긴 세월과 간난을 길을 택한 인내파’이고 또 한 쪽은 ‘죽음을 각오한 결행파’였다. 인내파의 대표인물은 이타가키였다.

그는 고향 고치(高知)로 가서 1874년 4월10일에 입지사(立志社)라는 정치결사를 조직했다. 이어서 그는 「건백서」를 신문에 게재하여 여론 몰이에 나섰고 1875년 2월에 전국적인 조직 애국사(愛國社)를 결성했다. 한편 결행파는 에도 신페이였다. 그는 1874년 2월16일 새벽 사가현청을 급습하여 이틀 만에 점령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는 정부군에 패하여 4월13일에 참수 당했다. 이러한 반정부운동의 고양에 직면한 정부는 여론을 완화하고자 오쿠보 도시미치는 이타가키를 오사카에서 만나 회유했다.

그 결과 이타가키는 참의로 정계에 복귀했다. 이어서 정부는 1875년 4월 입헌 조칙을 통해 점진적인 입헌 방향을 천명했다. 하지만 6월에 신문지조례 법을 제정하고 출판조례를 개정하여 자유민권 입장에 서는 정치평론·반정부언론에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이로 인해 이타가키는 참의에서 사퇴하고 정부를 떠났다. 1877년 6월에 이타가키는 다시 의원설립건백서를 제출했지만 또 기각되었다. 이에 이타가키는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애국사 회원 확대에 주력하여 전국적으로 10만 명이 가입했다.

그는 1878년 9월, 1879년 11월 오사카에서 애국사 전국대회를 열었고, 1880년 3월에도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는데 여기에서 두 가지가 결정되었다. 첫째는 전국 조직인 ‘국회기성동맹’을 결성하고, 둘째 민선의원 개설 청원서를 또 다시 제출한다는 것이다. 4월17일에 그들은 청원서를 제출했는데 또 기각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타가키는 1800년 12월에 애국사와 국회기성동맹을 통합하여 ‘자유당’을 결성하고 1881년 10월에 대규모 집회를 할 것을 결의했다. 그런데 1881년 3월에 참의 오쿠마 시게노부(1838∽1922)가 정치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그 내용은 1882년에 헌법을 제정하고 1883년에 국회를 개설하여 영국처럼 의원내각제로 하자는 진보적인 의견이었다. 이러자 주류파 이토 히로부미 등은 긴장하였다. 때 마침 홋카이도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이 터졌다.

개척사 관영사업은 1881년에 종료되었는데, 개척사 장관 구로다 기요타카가 관영공장을 특정 무역회사에 헐값으로 불하했다. 구로다는 12년간 약 1,400만 엔이라는 거금을 투자한 관영공장을 약 39만 엔에, 그것도 무이자 30년 상환에 불하하려고 했다.

이 계획이 신문에 폭로되자 여론이 악화되었다. 이토 등 번벌 세력은 관영공장 불하 정보를 신문에 유출한 자가 있다고 믿었고, 그 인물로 오쿠마를 지목했다. 오쿠마가 민권세력과 내통했다고 의심한 것이다.

1881년(메이지 14년) 10월에 이토 등 주류세력은 오쿠마 시게노부를 파면했다. 동시에 10년 이내에 국회를 개설한다는 조칙을 발표하여 사태를 수습했다. 이를 ‘메이지 14년 정변’이라 한다. (계속)

사진 1 메이지 신궁 참배를 기다리는 일본인들 (2019.1.2.)

사진 2 부적을 사려는 일본인들 (20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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