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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민권운동가들 변절하여 입신출세하고 민권운동은 몰락한 것
등록날짜 [ 2019년04월22일 22시10분 ]
1882년 3월, 이토 히로부미는 유럽으로 건너가 헌법 기초조사를 하였다. 1883년 8월에 귀국한 이토는 헌법 초안 작성에 나섰다. 한편 1881년에 국회기성동맹을 모체로 이타가키를 당수로 하는 자유당이 결성되었다.

자유당은 사족과 부농을 중심으로 한 정당으로 프랑스의 급진주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어서 정부에서 파면당한 오쿠마 시게노부는 1882년 4월에 ‘입헌개진당’을 결성하였다.

입헌개진당은 도시의 신흥자본가와 지식인을 기반으로 하고 영국의 의회 정치를 이상으로 하여 점진적인 개혁을 제창하였다. 자유민권운동이 활발해지자 1882년 3월에 후쿠지 등은 정부관리, 신관 과 승려를 기반으로 하는 입헌제정당을 결성했다.

일종의 어용정당이었다. 그런데 1882년 4월에 자유당 당수 이타가키가 선전활동을 벌이던 중 자객의 습격을 받았다. 그는 자객의 칼에 찔렸을 때 "이타가키는 죽어도 자유는 죽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로 인해 민권운동은 활기를 띠었고 여성의 참여도 늘었다. 한편 자유당과 입헌개진당은 협력보다는 세력다툼을 벌였다. 이에 편승하여 정부는 두 정당의 반목을 조장했다. 1882년 11월 이타가키는 정부의 권유로 외유했다.

입헌개진당은 이타가키의 도덕성을 집중 성토했다. 자유당도 미쓰비시가 후원하는 입헌개진당의 비리를 폭로하면서 반격했다. 1882년에 정부는 집회 조례 개정, 1883년에 신문지 조례 개정을 통해 집회와 언론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아울러 자유당 파괴공작에 나섰다. 맨 먼저 노린 곳은 후쿠시마였다.

1882년에 후쿠시마 현령으로 부임한 미시마 미치쓰네는 민권파의 탄압을 공언했다. 미시마는 대대적인 도로개설에 착수하여 세금징수와 부역을 강제했다. 그러자 고노를 의장으로 하는 자유당 우세의 후쿠시마 현회는 미시마가 제출한 의안을 부결시켰다.

그런데도 미시마는 공사를 강행하는 한 편 도로공사에 반대하는 자유당원과 농민 400여명을 체포하고 고노 등 지도자 6명을 내란음모죄로 투옥했다. 1884년 9월에 후쿠시마의 가혹한 처사에 분개한 16명의 자유당원은 이바라기 현 가바산(加波山)에 들어가 행방을 감추었다.

그들은 도치키 현 청사 낙성식에 도치키 현령을 겸하고 있는 미시마를 암살하고자 폭탄을 만들었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전원 체포되었고, 이 중 7명은 사형에 처해지고 나머지도 중형을 받았다. 이러자 자유당 좌파는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불황과 부채에 처한 상인 · 농민과 연합하여 곤민당을 조직하고 농민운동을 이끌었다. 1884년 10월에는 지치부 군 농민들이 무장봉기하여 군내(郡內)를 제압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봉기를 진압했다.

주모자중 7명이 사형, 7명이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유당의 기반이었던 농민이 몰락하고 급진적 행동에 반대하는 당원들이 이탈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내에서의 민권운동이 한계에 부딪치자 밖으로 세력을 확대해야 한다는 강경론도 생겼다.

1885년 12월에 자유당 좌파였던 오오이 켄타로 등은 조선과 일본의 자유민권운동을 묶는 연대를 만들어 양국의 민주주의 혁명을 목표로 삼았다. 자유당 좌파들은 한반도로 건너가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음모를 진행했다.

그들은 조선의 민씨 외척정권을 무너뜨리고 실각한 김옥균을 재집권시켜 조선에 입헌군주정을 구축하고 청나라로부터 독립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폭탄제조, 자금 조달 등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밀고자가 생겨 139명이 체포되었다. 핵심인물인 오오이와 조선에 침투할 예정인 부대의 책임자였던 아라이는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

한편 1887년 12월에 이토 내각은 보안조례를 제정하여 민권운동을 탄압하고 민권운동가 570명을 황궁에 접근 못하도록 도쿄의 30리 바깥으로 추방했다.

아울러 회유책도 병행했다. 1887년에 이타가키가 화족(華族 귀족)의 반열에 올랐고, 1888년에 오쿠마는 외무상에, 1889년에 고토도 체신상에 임명되었다. 민권운동가들은 변절하여 입신출세하고 민권운동은 몰락한 것이다. 참으로 씁쓸하다. 그런데 일본만 이랬을까. 우리는 어떠했나?

사진 1 메이지 신궁 안내판

사진 2 메이지 신궁 좌측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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