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王陽明)은 명(明)나라 사람으로 절강성 여요(餘姚)사람이다. 그가 일으킨 학문을 양명학(陽明學)이라 한다. 왕양명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옥된 어사 대선을 구출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가 환관 유근(劉瑾)의 미움을 샀다. 유근은 포악한 인물이었는데, 그는 권력을 남용하여 제멋대로 보복행위를 감행했다. 그는 여러 신하들 앞에서 왕양명에게 곤장을 맞는 벌을 안겨 주고 이렇게 선포했다. '오늘 왕양명의 관직을 빼앗고 그를 강남으로 추방한다.' 왕양명에게는 벌건 대낮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분노로 굳어져 있는 유근(劉瑾)의 얼굴에서 왕양명은 심상찮은 기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왕양명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선선히 관복을 벗고 백성의 옷차림으로 바꾸어 입은 후 조정을 빠져나왔다. 그는 재빨리 강가로 달려가 '굴원(屈原)1)을 추모하여'라는 시를 썼다. 그리고 나서 겉옷과 신발을 강가에 벗어 놓고 그 옆에 시를 쓴 종이를 돌멩이로 눌러 놓았다. 그는 시에 세상을 저주하고 자신이 물에 빠져 자결함을 고백해 놓은 후 강을 건너갔다. 왕양명이 막 강을 건너 숲 속으로 들어서자 유근이 파견한 병졸들이 북쪽 강기슭에 들이닥쳤다. 사방을 수색해보던 병졸들은 강가에서 왕양명의 옷과 시를 발견했다. '흥! 벌써 자살했군 그래!' 왕양명의 유물과 시는 즉시 유근의 손에 전해졌다. 그때까지도 유근은 분노가 사라지지 않은 듯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이었으나, 시를 읽어본 유근이 언제 화를 냈던가 싶을 정도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잘 죽었어! 잘 죽었지!' 그 동안 왕양명은 무사히 강을 건너 한적한 산골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실은 왕양명은 유근이 사람을 파견하여 뒤쫓아 올 줄을 미리 예견하고 유근을 속여 넘겼던 것이다. 왕양명의 묘책은 포숙아(鮑叔牙)의 계책과 같은 것이었다. 2019. 5. 6 강원구 행정학박사. 한중문화교류회장 <편집자주> 1) 굴원(屈原 B.C 340-278)
초(楚)나라 사람. 왕족 출신인 굴원은 뛰어난 재능으로 20대에 임금의 총애를 받았으나, 그의 재주를 시기하는 사람에 의해 모함을 받고 추방을 당함. 그 후 초나라는 진나라에 패하고 굴원은 돌아갔으나 다시 쫓겨난다(49세). 굴원은 상강 기슭으로 오르 내리며 정치적 향수와 좌절 속에 유랑 10년의 세월을 보내고 돌 을 품은 채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62세의 생을 마감. 중국 최고의 비극적 시인으로 평가 한다.